▲ 1987년 11월 23일 열린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례식에서 장남 이맹희·삼남 이건희·차남 이창희 형제(사진 오른쪽부터)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일요신문DB |
1967년 7월,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당시 서른여섯의 장남 이맹희 씨(81·전 제일비료 회장)가 본인을 대신해 삼성을 이끌어갈 것이라고 사장단 회의에서 발표했다. ‘삼성총수=이병철→이건희’로만 알고 있는 요즘 세대들에게는 갸우뚱할 만한 일이지만 당시엔 ‘삼성총수=이병철→이맹희’는 어쩌면 당연한 공식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 삼성가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며 후계구도가 통째로 뒤집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삼성의 황태자는 장남에서 삼남에까지 내려온 것일까. 현재 삼성가를 휘감고 있는 ‘상속재산 청구소송’ 파문이 잉태된 그때 그 시절, 삼성가 삼형제 후계 열전으로 돌아가 보자.‘밀수 사건의 주모자는 이○○(당시 한국비료 상무)이며 그는 이창식(주소부정)과 공모하여 사카린 원료 OTSA 2400부대를 지난 5월 5일 울산에 입항한 일본 선박 신주환으로 한국비료를 하수인으로 하는 건설자재와 같이 밀수입했다(<경향신문> 1966년 9월 16일자).’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의 서막이다. 일본의 차관을 제공받아 비료공장을 짓던 삼성이 리베이트를 상품화해 들여오다가 적발된 것. 밀수를 총괄한 것은 일본과 미국 유학을 하고 1961년 귀국, 안국화재 이사로 경영수업을 받던 이병철 삼성 창업주 장남 이맹희 씨. 1964년 일본 유학 후 귀국, 한국비료 이사로 재직하던 차남 이창희 씨(1991년 작고·전 새한미디어 회장)도 개입하고 있었다. 기사 속 ‘이창식’이 바로 이창희 씨의 가명이다.
밀수가 적발된 건 5월. 정권의 비호로 덮이는 듯했지만 9월 중순 보도를 기화로 삼성은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융단폭격을 맞는다. 이 과정에서 9월 22일 이창희 씨가 검찰에 출두, 닷새 후인 27일 구속된다. 아버지와 형을 대신해 희생양이 된 셈. 이에 이병철 회장은 마음속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결국 10월 22일 이 회장은 한국비료 국가 헌납과 경제계 은퇴를 발표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7년 7월 이 회장은 사장단 회의에서 이렇게 공식 선언한다.
“앞으로 맹희한테 삼성의 일을 모두 맡깁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 여러분들이 잘 도와주십시오. …실제적인 모든 일은 맹희와 더불어 하시고 만약 정당한 일인데 맹희 부사장이 거부하면 세 번 이야기해 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나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서른여섯의 ‘삼성 총수대행’. 이맹희 씨는 자서전에서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최고의 조직을 두 손에 쥐고 큰 기업을 만드는 것만이 나에게 주어진 의무였고, 나 스스로 정한 목표였다. 내 젊은 피가 나를 무섭게 뛰도록 만들었고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일을 해냈다”고 회고했다. 그는 10여 개의 부사장 직함을 갖고 사실상 삼성의 총수직을 수행했고 수원의 삼성코닝, 경산의 제일합섬, 가천의 삼성전관 공장 건립 등을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당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제일 먼저 부친 이병철 창업주는 1986년 펴낸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본인의 희망도 듣고 본인의 자질과 분수에 맞춰 승계의 범위를 정하기로 하고, 처음에는 주위의 권고도 있고 본인의 희망도 있어,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 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되어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밝혔다.
▲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장녀 이인희 한솔 고문. |
이병철 회장의 혹평에도 당시 이맹희 씨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호암자전>의 ‘6개월’을 넘어 이맹희 씨가 총수직을 수행한 지 1년이 지난 1968년 7월 16일 <매일경제>는 1면에 ‘제2의 탄생 삼성재벌, 이맹희 씨 어제오늘’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는 이맹희 씨에 대해 “이병철 회장이 그의 후계자로 책봉(?), 현재 수습총수 과정에 두고 있다”고 소개하며 “동정감·정의감이 풍부한 인간적인 사업가로 때론 격정적이고 과격한 사람으로 이야기되지만 대인관계가 넓어 삼성 총수로서 적격성을 보강해주며 기업인에게 필요한 적당한 이재 지능도 갖춘 것으로 알려진다”고 썼다. 그는 같은 신문에 1969년 1월에도 삼성그룹의 대표 격으로 새해 구상을 밝히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보도대로라면 잘나가던 ‘수습총수 이맹희’의 첫 번째 실책은 바로 물러났던 이병철 회장의 컴백 의지를 읽지 못한 것이었다. 밀수 사건 이후 틀어졌던 정부와의 관계가 호전되자 이병철 회장은 경영 복귀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맹희 씨는 “완전히 나에게 짐 지워진 줄로만 알았다”며 “아버지로서는 당신이 돌아오고자 하는데 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비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게 실책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무렵 공교롭게도 결정적 사건이 터진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 4월 24일 출근길에 “그는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해서 우리 집에서는 퇴출당한 양반”이라고 말한 그 사건, ‘이병철 회장이 이런 잘못이 있으니 기업에서 영원히 은퇴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청와대 투서 사건’이다.
이에 대해 이맹희 씨는 책에서 “절대 그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면서 사건의 내막을 비교적 자세히 밝혔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이병철·이건희 부자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일단 <묻어둔 이야기> 중 서류를 제출한 주체를 빼고 사건의 내막을 소개하면 이렇다.
1969년 연말께, 청와대에는 모두 6가지의 탄원사항이 적힌 서류가 제출됐다. 이병철 회장이 해외로 100만 달러를 밀반출하여 외화 도피를 했다는 것이 처음이었고 현충사를 지을 때 삼성에서 조경을 진행했는데, 물론 기증이기는 했지만 경비를 4000만 원 썼으나 7000만 원을 쓴 것처럼 부풀려 생색을 냈다는 것도 있었다. 그중엔 제일모직의 탈세와 제일제당의 탈세도 포함이 돼 있었는데 그 자료는 상당히 정확하고 삼성으로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밀수 사건의 여파가 가시며 복귀를 준비하던 시점. 이병철 회장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맹희 씨는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병철 회장은 끝까지 믿지 않은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맹희 씨가 스스로 밝혔듯 “청와대에서 이 문서를 만진 사람이 대부분 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해당 문서를 청와대에서 제일 먼저 손에 넣은 사람은 전두환 중령. 전 중령은 문서를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보여준 다음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 전두환 중령은 그와 어린 시절부터 더불어 자란 친구요, 매달 ‘용돈’까지 챙겨주는 사이였다. 박종규 실장 또한 가까운 사이였다.
이건희 회장 측은 “이보다 더 확실한 개입 증거가 어디 있느냐”면서 “자기가 해놓고 동생 이창희 씨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장남과 차남은 사실상 후계구도에서 배제된다. 먼저 차남 이창희 씨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병철 회장은 이창희 씨에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귀국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아버지와 소원해진 이맹희 씨도 1973년 여름 17개의 부사장 타이틀 중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 3곳만 남겨놓고 퇴출 수순에 들어갔다. 곧 ‘얼마간이라도 쉬자’며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75년 봄 귀국해 회사에 출근했지만 그는 이방인이 돼 있었다. 기나긴 야인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맹희 씨에게 복귀의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버지는 가족을 통해 여러 차례 나에게 ‘서울로 올라와서 무릎 꿇고 사과한 다음 다시 내 밑에서 일을 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계속 버티면 유언장을 나에게 불리하게 바꾸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한 재계 전문가는 “장남에 대한 이병철 회장의 애착은 컸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면 받아줄 수도 있었는데 이맹희 씨의 성격상 그걸 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본에 있던 시절에도 쉰다는 핑계로 일본지점에 출근도 하지 않고 이병철 회장이 일본을 방문할 때 영접하지도 않은 그였다. 귀국 이후에도 골프와 사냥으로 소일하며 계속 엇나간 이맹희 씨는 다시는 삼성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도록 하겠다.”
이맹희 씨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이 후계자로 이건희 회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처음 밝힌 것은 1976년 9월 중순경. 이병철 회장 암 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의 가족회의에서였다.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나에게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회고했다. 이병철 회장은 1년 뒤 일본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도 ‘후계자 이건희’를 밝히며 공식화했다.
1977년엔 이창희 씨가 귀국했다. 그는 아버지 이병철 회장을 찾아가 “개인적 비즈니스로 귀국했다. 예전의 행동도 뉘우쳤다”고 해명하고 사과했다. 그는 부친에게 3년간 문안인사를 하는 등 꾸준히 관계를 개선했다. 그 결과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제일합섬 주식을 이창희 씨에게 물려줬다. <호암자전>에서 이 회장은 “2남 창희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희망했으므로 본인의 그 희망을 들어주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1980년 3월 이창희 씨가 제일합섬 이사로 선임되자 ‘경영 컴백설’ 등 그가 후계자가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병철 회장이 일흔을 넘겼는데 장남은 배제됐고 삼남 이건희 회장은 38세로 아직 어린 데다 건강까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창희 씨 본인도 형인 이맹희 씨에게 의지를 피력했으나 대세는 변화가 없었다.
이병철 회장은 1986년 출간한 <호암자전>에서 “3남 건희는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유학 후 귀국하고 보니 삼성그룹이 전체 경영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룹경영의 일선에 차츰 참여하게 되었다. 본인의 취미와 의향이 기업경영에 있어 열심히 참여하여 공부하는 것이 보였다. 고행의 길을 왜 택하느냐, 중앙일보만 맡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정이었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면 그래도 놔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장·차남에 대한 평가와 달리 이건희 회장에게 애정을 듬뿍 담아 후계를 확고히 했다.
이윽고 1987년 이병철 회장의 임종 전 구두 유언을 통해 이건희 회장에게 경영권이 돌아가며 20년여에 걸친 삼성 후계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병철 회장 사후 삼성가가 이맹희파와 이건희파로 갈라졌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이건희 체제는 곧 안착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