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절대 묻지 않았다는 강원도 인제군의 오지 곰배령. 이 깊고 깊은 산속까지 찾아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막힌 사연 하나쯤은 있어서라고 생각할 만큼 세상과 단절된 고립무원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한 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30년 넘게 도시에서만 생활했던 이하영 씨(63)는 그런 곰배령이 얼마나 깊은 오지인지도 모른 채 17개월 어린 세쌍둥이를 자연에서 키우고 싶어 무작정 이곳에 찾아들었다.
처음 그녀가 계획했던 곰배령살이는 딱 1년. '이 겨울이 끝나면 돌아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겨울 곰배령에 가득 내린 눈꽃들은 그녀가 돌아갈 길을 새하얗게 덮어버렸다.
눈꽃의 아름다움, 순백의 세상에 반해 길을 잃은 지도 모른 채 곰배령살이에 푹 빠졌던 이하영 씨. 돌아보니 세월은 어느덧 30년이 흘렀고 그녀는 여전히 곰배령에서 내리는 눈꽃을 맞으며 겨울을 나고 있다.
문학소녀였던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꾸던 하영 씨가 마주한 곰배령의 겨울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겨울이 길게는 6개월이나 이어지며 툭하면 내리는 눈에 고립되기 일쑤였고 산을 타고 오는 바람마저 거셌다.
그럴 때마다 망설이는 하영 씨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곰배령의 자연이었다. 한 줌의 씨를 뿌리자 한 포대의 나물로, 자연에서 제 역할을 마친 다래 넝쿨은 고립의 두려움을 잊게 하는 설피로, 거센 바람은 맛난 황태로 돌아왔다. 곰배령에서 살아가는데 소녀도 여인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하영 씨.
그녀는 마침내 여인의 탈을 벗어 던지고 자연을 누리기 시작했다. 이제 장작을 패는 일도, 얼음을 깨는 일도 자연이 그녀를 혹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그저 겨울을 나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하영 씨는 말한다. "여인의 탈을 벗으면 남자가 될까, 두려웠지만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고 말이다.
17개월, 두 살에 곰배령으로 들어왔던 세쌍둥이는 이제 하영 씨가 곰배령을 선택했던 나이인 30대 초반이 됐다. 산을 운동장 삼아, 계곡을 놀이터 삼아 자연에 깃들어 자란 세쌍둥이. 그래서인지 도시의 빠름보다 산의 우직함과 느림을 닮았다.
첫째 나래 씨는 예술치유학을 공부했으며 둘째 다래 씨와 셋째 도희 씨는 산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산이 익숙했던 세쌍둥이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첫째와 셋째는 일 때문에, 도시 생활이 궁금해 잠시 떨어져 생활하지만 어디에 있어도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이곳 곰배령에서 쌓은 추억이다.
그리고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세쌍둥이는 하영 씨에게 말한다. 3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도 곰배령을 선택해 달라고 말이다.
곰배령에 다시 눈꽃이 내렸다. 눈이 내릴 때면 하영 씨는 설피를 챙겨 집 뒷산이라고 말하는 점봉산에 오른다. 눈의 터널을 지나 만날 수 있는 숲의 정령을 찾기 위해서다. 큰어머니처럼, 큰할머니처럼 하영 씨를 따뜻하게 대해주며 곰배령의 삶을 가르쳐 주었던 이웃 어르신들.
세상에 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순백의 눈꽃이 만개하면 곰배령 정상에 마치 그분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푸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올겨울에도 곰배령에 내리는 눈꽃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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