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에 실린 마유미, 김현희에 대한 기사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오열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출처=경향신문 |
“목욕할래요?”
내가 물었으나 마유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기다리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마유미는 간간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사관들의 질문이나 대화에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자 우울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우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인내력에 놀랐다. 공작원으로 고도의 훈련을 받았겠지만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마유미가 목욕을 해야 하니 남자 분들은 밖으로 나가세요.”
나는 남자 수사관들에게 말했다.
취조실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남자 수사관들이 밖으로 나가자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마유미는 아직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얼굴이 더러우니 목욕하고 쉬어요. 미리 말해 두지만 어디에서도 우리와 떨어질 수 없어요.”
채명희 수사관이 손짓을 하면서 말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마유미는 망설이지 않고 채명희 수사관을 따라 들어갔다. 여자 수사관들이 그녀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는 것은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녀의 나신을 자연스럽게 살피기 위해서였다. 비록 여자라고 해도 몸의 형태를 보고 어떤 훈련을 받은 공작원인지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나도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선배, 저 여자 거기 체모가 없어요.”
내가 욕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채명희 수사관이 입구에서 나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채명희 수사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로 그녀의 등에 물을 뿌려주었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목욕하면서 편히 쉬어요.”
나는 그녀의 등을 밀고 비누칠까지 해주었다. 물론 그녀는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씻지 못해서 때가 둥둥 뜨네.”
욕조는 금세 더러워졌다. 바레인에서 목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공작원 생활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유미는 욕조의 더러운 물을 보고 창피한지 물만 휘휘 저었다. 그녀에게 물을 뿌려주면서 하체를 살피자 역시 체모를 밀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체모는 겨우 5㎜ 정도 자란 상태라서 민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목욕을 마치자 고참 수사관인 신영철(가명) 수사관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일반인들이라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주무 수사관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몸 상태로 어떤 종류의 공작원인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신영철 수사관이 나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상태로 봐서 바레인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 그녀가 수사에 협조하기 시작했을 때 수사관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바레인 육군병원에 체포되어 있을 때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바레인 육군병원에서 왜 그랬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도 나에게는 그것이 의문이다. 마유미가 자백한 후 바레인에서 압수당한 그녀의 소지품을 확인시키는 절차가 있었다. 옷에서부터 사소한 물품까지 모두 있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조그만 주머니가 있어서 열어보니 손톱 조각이 들어있었다. 그녀에게 물어보니 바레인 육군병원에 있을 때 간호하던 중국계 간호사가 손톱을 깎았다고 했다.
“뭘 이런 것까지 넣었담?”
김현희는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그들이 손톱을 깎은 이유는 체포 당시 청산가리가 든 앰풀을 깨물고 쓰러졌기 때문에 그녀의 몸에서 청산가리 반응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고 바레인 경찰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손톱에서 청산가리 반응이 나온 걸로 되어 있었다. 같은 이유로 그녀의 체모를 깎았다면 그 체모도 증거품으로 보냈을 텐데 바레인 경찰이 보낸 증거물에는 없었다.
마유미를 서울로 압송한 첫날은 일체의 심문을 하지 않았다. 목욕을 마친 뒤에 그녀를 쉬게 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저녁시간이 되자 안기부 식당에서 식사가 배달되어 왔다. 식사는 직원들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일본인으로 위장을 했으나 한국식 식사였다. 마유미는 식사를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
‘초조하니까 식사를 조금밖에 할 수 없겠지.’
나는 식사를 조금밖에 하지 않는 그녀를 이해했다. 내가 그녀의 처지라고 해도 식사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나는 맛있게 식사를 했다.
“오늘은 심문이 없으니까 편히 쉬어요.”
나는 마유미에게 한국말로 했다. 마유미는 내 말을 못들은 체했다. 내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시선이 부딪치는 일은 자주 있었다. 나는 테러리스트의 눈에서 무엇인가 읽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했고 냉정을 잃지 않았다.
마유미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잠을 잤다. 심문실에는 책상과 침대가 있었다. 처음에는 잠이 오지 않는지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러나 곧 잠이 들었다. 나와 채명희 수사관은 그녀가 잠이 든 뒤에도 감시를 해야 했다.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잔뜩 긴장해 있다가 안기부로 돌아오면서 어느 정도 긴장감이 풀어져 있었다. 긴장감이 풀어진 탓인지 잠이 쏟아졌다.
‘쟤는 잠이 올까?’
나는 잠을 자고 있는 마유미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서운 테러리스트였다. 바레인 공항에서 남자는 자살했고 그녀는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앞으로 그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것은 나로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 군부대를 방문한 김현희(왼쪽 두 번째)와 최창아 씨(맨 오른쪽). 비행기를 추락시킨 테러리스트에서 안보강연을 하러 다니기까지 그의 인생이 참으로 아이로니컬하다. 사진제공=최창아 씨 |
마유미는 하늘색 트레이닝 상하의에 짙은 회색 재킷을 입었고 입에는 대형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남녀 1명씩의 관계 직원에 이끌려 트랩을 내린 마유미는 계단조차 내려다보기 힘겨운 듯 그동안의 수사과정에 지친 탓인지 고된 표정이었다.
마유미는 하오 2시 28분쯤 국립경찰병원 소속 서울7노 2586호 앰뷸런스에 실려 관계기관으로 이송됐다.
이에 앞서 음독자살한 하치야 신이치의 사체를 담은 밤색관이 화물 출입구를 통해 내려져 경찰병원 소속 서울7노 5529호 앰뷸런스에 실렸다.
마유미 일행의 도착에 앞서 김포공항에 국내선 계류장 주변에는 또 다른 테러행위에 대비, 무장군인들과 공항 보안요원들이 삼엄한 경비를 폈다.
공항에는 마유미의 한국 인도를 취재하려는 내외신 기자 100여 명이 몰려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신문을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문 1면을 비롯하여 많은 부분이 내일로 닥쳐 온 대통령선거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내일 밤이면 투표가 끝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잠을 자고 있는 마유미를 보았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마유미가 내 앞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KAL기의 추락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비행기의 파편은 아직 찾지 못했고 블랙박스도 회수할 수 없었다. 대한항공현지조사단은 태국 일대에서 부유물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12월 14일 상오부터 나콘담 섬 부근 해안을 수색하고 있었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사단 단장은 대한항공 조중건 사장이었다. 그가 직접 현지에 날아가서 수색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인도와 미얀마, 태국도 비행기의 파편이나 부유물을 수색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으나 넓은 바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KAL기가 공중에서 폭발하여 추락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KAL기의 잔해는 1990년 5월 22일이 되어서야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의 선체에는 서울 1988이라는 글자와 올림픽마크, 태극 문양이 선명하여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비행기의 잔해를 찾는 작업은 수년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115명을 죽음으로 이끈 테러리스트. 그녀가 내 앞에서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