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역사박물관이 최근 입수한 '마도일기' 저자는 1906년 홍주의병으로 참여했다가 대마도로 끌려가 유폐되었던 류준근이었다. 홍주는 홍성의 옛 이름이었다. 류준근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충청도 홍주에서 봉기한 의병의 지도부였다.
열흘 간의 혈투 끝에 홍주성을 다시 함락한 일본은 류준근 등 9명의 의병을 대마도 유배형에 처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유배였다. 이들이 유폐는 당시 조선통감이던 히토 히로부미가 내린 고도의 정책적 결정이었다.
홍주의병들이 끌려간 곳은 대마도 남쪽의 이즈하라로 이들 홍주9의사는 역시 대마도로 끌려온 전라도 의병장 최익현과 함께 치열한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일본 의복을 거부하고 음식을 거부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곧이어 단발령이 내렸다. 전국적인 반일감정이 고조되었고 홍주 유학자들은 1896년 초 김복한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1차 홍주의병이었다. 이들은 홍주성을 무혈점령하고 각 지역에 통문을 돌려 의병 가세를 독려했다. 그러나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입성 3일 만에 의병 지도부는 체포되고 의병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10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자주권과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다시 전국적인 의병 봉기가 있었다. 홍주에서는 민종식 대장이 이끄는 의병이 봉기, 홍주성을 점령했다.
2차 홍주의병이었다. 1000여명의 홍주의병들은 열흘간 홍주성을 사수했으나 우세한 전력을 앞세운 일본군 정규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80여 명이 채포됐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관장은 "홍주의병은 그동안 산발적인 각개전투의 단계에서 일본의 정규 군대를 대상으로 한 전쟁 단계로 돌입했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일제는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고 의병의 전국적인 확산을 막기 위해 9명의 의병핵심 지도부에게 사형 대신 대마도 유배형을 내렸다. 이들이 홍주9의사였다.
1차 의병장이었던 김복한은 1919년 유생들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이름을 올렸다. 김복한의 제자인 홍성 출신의 김좌진에게 백야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김좌진은 무장독립운동에 투신하며 1920년 청산리대첩을 거뒀다. 홍성 출신의 민족시인 만해 안용운 역시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홍성의병의 정신을 이어갔던 것이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1910년대 광복회 활동 그리고 삼일운동, 만주의 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운동으로까지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홍주의병의 정신은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 무장독립투쟁의 시금석이자 독립운동사의 큰 도화선이었던 홍주의병, 이제 잊혀졌던 그 역사를 되살려야 한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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