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능력 인정받아 승진, 후계자로 ‘딸’ 거론…“대기업보다 기회 많고 유연한 덕분”
세계 최대 의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ODM(제조업자개별생산) 수출업체 세아상역을 계열사로 거느린 글로벌세아 그룹이 최근 승계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창업주인 김웅기 회장의 차녀인 김진아 전무가 지난해 하반기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부터다. 김진아 부사장은 글로벌세아뿐만 아니라 지난해 초 세아상역 이사회에도 자매들 중 처음으로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렸다. 지주사인 글로벌세아가 비상장사인 탓에 지분 승계 관련 정보를 알기는 어려우나 김 부사장이 그룹 경영에 가장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글로벌세아는 국내 유일의 종합제지업체인 태림페이퍼, 글로벌 EPC 전문기업인 세아STX 엔테크 등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쌍용건설 인수까지 마무리하며 사세를 크게 키웠다. 2021년 이미 그룹 연결기준 매출 3조 5800억 원에 영업이익 2411억 원을 기록한 글로벌세아는 쌍용건설 인수로 올해 공정위가 지정하는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국내 주요 기업 중 여성이 기업을 승계해 총수가 된 경우가 워낙 드문 탓에 글로벌세아의 승계 절차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다만 글로벌세아 측은 승계에 대해 말을 아꼈다. 글로벌세아 관계자는 “저희도 아직 승계가 어떻게 될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전혀 입장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노스페이스, 룰루레몬 등 스포츠 아웃도어 의류브랜드로 유명한 영원무역그룹에서는 성기학 회장의 차녀인 성래은 영원무역 사장이 지난해 11월 정기인사에서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영원무역 사장으로 승진한 후 2년 만이다.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의 나이가 70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승계 구도가 윤곽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원무역그룹은 차녀와 삼녀가 경쟁하는 구도였다. 둘째인 성래은 부회장이 생산·제조 OEM, 셋째인 성가은 영원아웃도어 부사장이 노스페이스 내수 산업을 맡았다. 성가은 부사장이 맡은 영원아웃도어 매출은 2014년 정점을 찍고 이듬해부터 내리막길을 걷다가 2020년에 들어서야 실적이 개선되기 시작한 반면 OEM 사업은 10년간 3배가량 성장하며 꾸준한 매출 성장세를 그렸다. 영원무역의 지난해 1~3분기 누적 매출액은 2조 8742억 원으로 2021년 매출액을 넘어서고 누적 영업이익도 97%가량의 성장을 달성했다. 눈에 띄는 성과를 꾸준히 내 온 덕분에 아버지 눈에 든 성래은 부회장이 한 발 앞서가는 모양새다. 영원무역 관계자는 “승계와 관련해 저희가 공식적으로 전달드릴 수 있는 입장은 없다”고 밝혔다.
세정그룹의 경우 박순호 회장의 셋째 딸인 박이라 사장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케이스다. 패션기업인 세정을 필두로 고객 데이터 분석업체 세정씨앤엠, 생활용품 업체 세정씨씨알, 캐주얼의류 사업체인 세정과미래 등이 계열사인데 세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박이라 사장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박 사장은 2019년 5월 세정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후 지난해부터 세정의 여성복 디자인 최종 디렉팅을 도맡으며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는 평가다.
1946년생인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 역시 고령인 만큼 최근 승계작업에 속도가 붙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2021년도에 전문경영인 체제를 처음 도입한 세정은 올해 1월 초 대표이사를 교체했다. 신임인 함현종 대표이사는 전략기획실과 비서실 등을 두루 거치며 오너 일가를 장기간 보좌해 온 인물로 알려졌다. 2세인 박이라 사장의 입지를 다지는 데 힘을 실어주며 ‘징검다리’ 역할을 안정적으로 해낼 것으로 전망된다. 세정그룹 관계자는 “박이라 사장님만 경영에 참여하고 계셔서 그룹 승계가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 맞다”고 말했다
중견기업 오너일가의 여성 경영인의 약진은 대기업과 비교하면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국내 주요 대기업 중 여성 총수가 있는 기업은 2개에 불과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4월에 지정한 47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서 여성 총수는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유정현 엔엑스씨(NXC·넥슨 지주사) 감사밖에 없다. 유정현 감사의 경우 남편인 고 김정주 전 회장과 넥슨을 공동경영하며 회사 창립에도 기여한 인물로 자수성가형이기 때문에 승계 이슈와는 거리가 멀다. 이명희 회장 역시 그룹 전체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인 고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의 지시로 백화점 사업부를 맡아서 운영하다가 신세계 그룹이 삼성에서 분리된 후인 1998년 남편인 정재은 전 회장으로부터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장자 중심 경영 승계가 이뤄지다 보니 여성이 그룹 수장까지 오르기 쉽지 않은 탓이다. 이와 관련,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기업은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기조가 훨씬 강해 LG그룹처럼 양자를 들여서라도 승계하는 경우가 있다. 중견기업에서도 사위가 승계하는 경우가 더러 보이기도 하지만 대기업보다 규모가 작고 부담이 적은 덕분에 딸들에게 훨씬 더 기회가 열려 있고 승계에 유연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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