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가 열린 지난 6일 사회당 후보 프랑수와 올랑드가 투표를 마친 뒤 기표소를 빠져나오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지난 5월 6일 결선투표가 치러졌던 프랑스 대선에서 17년 만에 좌파 정권이 집권하면서 유럽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인물은 11년간 사회당 대표를 지냈던 프랑수아 올랑드(58)다. 지금까지 정치계에서 늘 ‘2인자’로 불리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올랑드가 대통령이라는 최고 지위에 오르자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이 적잖이 놀라워하고 있다. 더 이상 긴축은 없다며 정책 추진의 변화를 예고한 그를 두고 세계 각국은 유로존에 미칠 파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올랑드가 니콜라 사르코지(57)를 물리치고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로 프랑스 언론들은 ‘사르코지의 화려함과 공격성에 지친 민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제 좀 조용히 살고 싶다’는 프랑스인들의 갈망이 이번 표심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올랑드는 선거 내내 ‘보통 남자’라는 이미지를 내세웠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평범한 대통령’을 약속한 올랑드가 앞으로 어떤 정책을 펼칠지는 이미 그가 내세운 공약에도 잘 드러나 있다. 부자 증세, 최저임금 인상, 공공부문 투자 확대 등을 내세운 이른바 ‘친서민 정책’들이 그것이다. 올랑드의 ‘부드러운 리더십’은 과연 프랑스인들의 지친 민심을 얼마만큼 달래줄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사회당이 정권을 잡은 것은 지난 1981년부터 1995년까지 재임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마지막이었다. 때문에 이번 대선 승리가 좌파 진영에게 더욱 뜻 깊은 것은 당연한 일. 여론조사 내내 단 한 번도 사르코지에게 선두를 빼앗기지 않으면서 승승장구했던 올랑드는 결선투표에서도 득표율 51.67%로 48.33%에 그쳤던 사르코지를 물리치고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올랑드는 여러모로 사르코지와 상반되는 인물이다. 추구하는 정치적 성향이나 정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격이나 이미지,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사르코지와 뚜렷이 대비된다. 때문에 이런 차이점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킨 선거 전략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주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른바 ‘무슈 노르말(보통 남자) 대 블링블링(사르코지의 화려한 생활을 일컫는 말)’의 대결 구도가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우선 둘의 차이점은 정책 방향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 35년간 적자 재정을 면치 못했던 탓에 줄곧 긴축 재정을 주장했던 사르코지와 달리 올랑드는 경기 회복을 위해 오히려 정부 지출을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는 최저임금 인상과 교사 6만 명 충원 등 공공부문 투자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필요한 재원은 부자 증세로 메우며, 이를 위해 연소득 100만 유로(약 15억 원) 이상인 부자들에게 75%의 세금을 부과하고 100만 유로 이하의 소득자에게는 최고 세율을 41%에서 45%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또한 대통령 전용기 대신 기차를 타고 출장을 다니거나, 대통령 월급을 3분의 1가량 깎고, 면책특권을 포기하는 등 대통령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들 역시 다수 포기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사정이 이러니 올랑드가 고소득층보다는 저소득층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올랑드는 선거 캠페인 때부터 ‘서민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갑부 친구를 여러 명 두고 있는 ‘부자 이미지’의 사르코지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나긋나긋하고 넉살 좋은 푸근한 이미지로 ‘옆집 아저씨’라고 불리는 올랑드는 길거리 유세를 할 때에도 “시민들과 가능한 가까이서 호흡하고 싶다”는 이유로 일부러 경호원을 적게 거느리고 다녔으며, 짧은 거리도 무조건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비행기 애용가’인 사르코지와 달리 항상 기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부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지는 손목시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에피소드 역시 둘의 차이점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기자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올랑드는 자신이 차고 있던 평범한 손목시계를 풀어서 탁자에 대고 톡톡 두드리면서 시계가 잘 가고 있나 확인하는 소박한 모습을 보였던 반면, 사르코지는 길거리 유세를 시작하기 전 행여 자신의 명품 시계가 망가질까 손목에서 풀러 주머니에 넣고 유세를 다녔다.
하지만 올랑드의 이런 소탈한 모습에 대해 ‘선거용’이라거나 ‘꾸며낸 연극’이라며 비웃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사실. 그러나 올랑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평소 그의 생활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의원 시절부터 매일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고 출퇴근했던 그를 가리켜 한 동료 의원은 “마치 피자 배달원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한번은 그가 슈퍼마켓에서 직접 장을 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올랑드는 “냉장고가 비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렇게 직접 장을 보러 나올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부드럽고 차분하며 온화한 카리스마 역시 강한 카리스마와 정력적인 남성미를 내세웠던 사르코지와 대비됐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경청하는 쪽에 가까운 올랑드는 중도 성향에 가까우며 “나는 강경 좌파가 되고 싶진 않다. 우리에게는 분열보다는 결속력 강한 단단한 좌파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부드러운 리더십에 대해 사회당의 한 내부 인사는 그를 ‘갈대같은 남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바람에 구부러지긴 하지만 결코 부러지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깨끗한 사생활 역시 그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다. 정계에 몸담은 이후 단 한 번도 성추문이나 뇌물 스캔들에 휘말린 적이 없을 정도로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하지만 이런 부드러운 이미지에 대해 항간에서는 ‘너무 유약하다’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싸우기 싫어하고 분열과 대립을 극도로 싫어하는 물렁물렁한 스타일이 국가 원수로서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마시멜로 맨’ 혹은 ‘플랑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플랑비’란 프랑스 어린이들이 즐겨 먹는 캐러멜 푸딩을 뜻한다.
이런 비난을 잘 알고 있었던 올랑드는 자신의 느긋한 이미지가 뚱뚱한 체형 때문에 행여 더 부정적으로 비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선에 앞서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평소 좋아하던 와인과 치즈, 햄버거, 초콜릿 등을 줄여 6개월 만에 체중을 무려 12㎏ 이상 감량한 것이다. 또한 고리타분한 느낌의 뿔테 안경을 벗어 던지고 얇은 금테 안경으로 바꾸면서 날렵하고 강인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이밖에 한 번도 장관직을 맡아본 적이 없어 행정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 역시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11년 동안 당대표를 맡긴 했지만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오랜 동거녀였던 세골렌 루아얄에 가려 늘 ‘2인자’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 역시 선거 내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런 까닭에 불과 1년 전만 해도 당내에서조차 아무도 그를 대선 후보로 점치지 않았으며, 그의 이번 승리를 가리켜 우연히 찾아온 행운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올랑드의 오랜 친구인 스테판 르폴 유럽의회의원은 “사실 올랑드는 10년 동안 조용히 대선을 준비해왔다”고 반박하면서 “그는 항상 저평가돼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너무 부드럽다고 말하지만 그 부드러운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정치적 동물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사실 대립을 싫어하는 그의 이런 부드러운 중도적 성향은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 북부 루엥 출생인 그는 이비인후과 의사였던 아버지와 사회사업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극우파였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극좌파였으며, 이런 대립은 어린 올랑드로 하여금 일찌감치 중도를 깨닫게 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올랑드의 중도성향과 실용주의 노선은 부모의 대립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전기작가인 사지 라피 역시 “올랑드의 타협과 절충을 추구하는 성향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올랑드는 우파였던 아버지보다 미테랑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좌파였던 어머니와 더 가깝게 지냈으며, 훗날 어머니를 따라 미테랑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가 이번 대선 승리를 “어머니에게 바치겠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1974년 파리경영대학에 입학한 그는 당시 받은 장학금으로 미국 여행을 갔으며,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패스트푸드업계의 성공신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당시 작성한 보고서에서 그는 “맥도널드와 KFC는 프랑스에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으며, 그때의 경험에 대해 훗날 <뉴욕타임스>를 통해 “나는 당시 치즈버거로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정치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파리정치대학과 프랑스 정치인의 산실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올랑드가 정치에 뜻을 품게 된 것은 18세 때 미테랑 전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이런 이유에서 대학교 1학년 때에는 미테랑 대선 캠프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으며, 이를 계기로 1979년 정식으로 사회당 당원이 됐다. 또한 동시에 미테랑 정부에서 청년 경제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정치 경험을 쌓아 나갔다.
1981년 프랑스 중부 코레즈에서 총선에 출마해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에게 패하긴 했지만 그해 ‘무서운 신인’으로 주목 받으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가 정계에 공식 진출한 것은 1988년 코레즈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였다. 그 후 1995년 사회당 대변인을 거쳐 1997년 사회당 대표를 맡게 됐으며, 2008년까지 11년간 대표직을 유지하는 꾸준함을 보였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튈 시장을 지냈던 그는 2007년 사회당 경선에 출마해 동거녀였던 세골렌 루아얄과 맞붙었지만 패하고 말았다. 낙마 후에는 사회당 대표에서 물러나 2011년까지 코레즈 지방의회 의장을 지냈다.
그의 일생 일대 최고의 행운은 우연한 곳에서 찾아왔다. 지난해 사회당의 강력한 대선후보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가 뉴욕에서 호텔 여종업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되면서 출마를 포기한 것이다. 이에 지난해 10월 경선에 뛰어들었던 그는 유력한 후보였던 마르틴 오브리를 꺾고 마침내 대권행을 거머쥘 수 있었다.
비교적 무난한 정치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 정치적 위기란 딱히 없었다. 한 가지 있었다면 2007년 루아얄에게 경선에서 패했던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올랑드는 “나의 정치적 멘토는 미테랑 대통령”이라며 ‘제2의 미테랑’을 꿈꾸고 있다. 그는 이미 선거 유세 때부터 미테랑의 말투, 걸음걸이, 스타일을 흉내 내면서 자신이 후계자임을 공표한 바 있다. 미테랑 정권의 슬로건이었던 ‘강한 프랑스’를 강조하면서 좌우를 초월한 하나 된 프랑스를 꿈꾸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과연 그는 17년 전 사회당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을 임기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그는 사르코지에 비유해 자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돈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영부인’ 트리에르발리는 누구
‘동거녀’ 퍼스트레이디 첫 등장
한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 올랑드는 현재 <파리마치> 정치부 기자였던 발레리 트리에르발리(47)와 동거 중에 있다. 20년 동안 정치부 기자로 일하면서 케이블 방송국에서 정치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던 트리에르발리는 지난해 올랑드가 대선에 뛰어들면서 현재 문화부로 자리를 옮긴 상태다.
올랑드의 동거녀로서 함께 엘리제궁에 들어가게 된 그녀는 “나랏돈은 받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일을 계속 하면서 아이들을 키울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로써 그녀는 프랑스 최초의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영부인’이 되는 한편, 자신의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최초의 ‘워킹맘 영부인’이 될 전망이다.
프랑스 동부 출신으로 소르본대학에서 역사 및 정치학을 전공했던 트리에르발리는 대선 내내 올랑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면에서 사르코지의 아내인 카를라 브루니와의 차별화를 꾀했다. 모델 출신에 가수였던 브루니가 화려하고 사치스런 스타일이었다면 트리에르발리는 소박하고 평범한 아줌마에 가깝다. 두 번의 결혼에서 세 아들을 둔 그녀는 “나는 시장에서 옷을 사 입는다” “유명 디자이너의 옷이라고는 미테랑 대통령의 초대로 엘리제궁 만찬에 참석했을 때 빌려 입었던 드레스가 전부였다”고 말했으며, “평소 아이들 침대 밑에서 양말짝을 찾으면서 시간을 보낸다”며 자신이 평범한 사람임을 강조했다.
그녀가 올랑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은 2005년 올랑드를 인터뷰하면서였다. 당시 올랑드는 사회당의 동료 정치인이었던 세골렌 루아얄과 30년 가까이 동거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있는 등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미 트리에르발리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올랑드는 2007년 대선 직후 루아얄과 결별한 후 곧바로 트리에르발리와 동거를 시작했다.
트리에르발리가 영부인이 되기에는 ‘너무 공격적’이라며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가 성차별적인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파리마치>의 동료 기자의 뺨을 때린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에게는 공격적인 성향의 경호견인 ‘로트와일러’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 대해 트리에르발리는 “적어도 브루니보다는 사람들의 이목을 덜 끌 것”이라며 “결코 앞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 역시 “알려진 바와 달리 그녀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다. 아마 누구보다도 내조를 잘 할 것”이라며 “올랑드가 다이어트를 하도록 옆에서 조언한 것 역시 트리에르발리였다”고 귀띔했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