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전’ 강백호 본헤드 플레이 ‘일본전’ 김광현 갑작스런 난조…팀 평균자책점 최하위
한국은 한때 WBC를 빛낸 다크호스였다. 2006년 대회 4강에 오르고 2009년 대회에선 준우승까지 차지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2013년과 2017년 대회에선 연이어 1라운드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조기 탈락하는 수모를 맛봤다. 2017년 대회는 안방인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렸기에 더 뼈아팠다. 6년 만에 재개된 올해 대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늘 한국을 경계해왔던 일본 언론조차 11일엔 "한국은 더 이상 야구 강국이 아닌 것 같다. '도쿄의 악몽'이 계속되고 있다"고 썼다.
#조 2위는 무난해 보였던 한국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일본·호주·중국·체코와 함께 B조에 포함됐다. 일본은 명실상부 한국보다 한 수 위인 야구 강국이지만, 나머지 세 나라는 그 반대다. 미국 야구전문잡지 베이스볼아메리카(BA)는 개막 전 각 팀 전력을 분석한 기사에서 일본 2위, 한국 7위, 호주 18위, 체코 19위, 중국 20위로 순위를 매겼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나라가 20개국이니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B조 3개국이 최하위권 세 자리에 차례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조 2위만 하면 8강에 오르기 때문에 한국 대표팀은 조심스럽게 17년 만의 4강 진출까지 목표로 삼았다. WBC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강철 KT 위즈 감독은 "방심하지 않고 첫 경기인 호주전에 투수를 총동원해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한국은 2013년과 2017년 대회 1차전에서 각각 네덜란드와 이스라엘에 무릎을 꿇었다가 그 패배 탓에 1라운드 문턱을 넘지 못한 아픔이 있다. 이번엔 '첫 경기 패전 징크스'를 극복하고 호주를 밀어내 최소한 조 2위를 확보하겠다는 계산을 했다. 그러나 뚜껑이 열리자 호주는 예상보다 강했고, 한국은 그 반대였다.
경기 초반 흐름은 팽팽했다. 3회까지 0-0으로 탐색전을 펼쳤다. 한국 선발 고영표가 3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호주 선발로 깜짝 등판한 장신의 왼손 투수 잭 오로린도 3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냈다. 0의 행진을 먼저 깬 건 호주 쪽이었다. 4회 초 선두타자 대릴 조지가 몸에 맞는 공으로 걸어 나간 뒤 애런 화이트필드가 유격수 방면으로 번트 안타를 쳐 무사 1·2루를 만들었다. 흔들린 고영표는 후속타자 릭슨 윈그로브와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을 내준 뒤 로건 웨이드에게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맞아 선취점을 빼앗겼다. 호주는 또 5회 1사 후 팀 케넬리가 고영표를 상대로 좌중월 솔로포를 쏘아올려 2-0 리드를 잡았다.
침묵하던 한국은 5회 말 단숨에 전세를 뒤집었다. 1사 후 김현수의 볼넷과 박건우의 좌전 안타로 1사 1·2루를 만들었다. 다음 타자 최정이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양의지가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역전 3점 홈런을 날렸다. 양의지는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기쁨을 표현했다. 6회 말 2사 1루에선 박병호가 큼직한 좌중간 적시 2루타를 날려 4-2로 도망갔다.
다만 이 리드는 오래 가지 못했다. 7회 초 올라온 소형준이 몸에 맞는 공과 안타를 연달아 내줘 1사 2·3루에 몰렸다. 교체 투입된 김원중이 후속타자 알렉스 홀을 헛스윙 삼진으로 처리하며 위기를 벗어나는 듯했지만, 로비 글렌디닝에게 포크볼 3개를 연이어 던지다 한복판으로 몰려 재역전 3점포를 얻어 맞았다.
#세리머니 하다 발 떨어진 강백호
한국은 7회 말 공격에서 곧바로 다시 추격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한껏 달아오르려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치명적인 실수가 나왔다. 1사 후 대타로 나온 강백호는 좌중간을 가르는 시원한 안타를 치고 2루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지난 시즌 내내 부상으로 이름값을 하지 못했던 그가 모처럼 타석에서 존재감을 뽐낸 순간이었다.
그런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2루에서 만세를 부르며 포효하는 세리머니를 하다 오른발이 베이스에서 떨어졌다. 끝까지 강백호를 바라보며 달려왔던 호주 2루수 글렌디닝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태그했다. 강백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어봤지만, 비디오 판독 결과 명백한 아웃이었다. 한국 더그아웃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다음 타자 양의지가 곧바로 안타를 쳤지만 이미 투아웃. 한국은 결국 추가 득점 없이 이닝을 끝내야 했다.
집중력 싸움에서 이긴 호주는 8회 초 더 달아났다. 베테랑 왼손 투수 양현종을 상대로 연속 출루해 1사 2·3루를 만든 뒤 로비 퍼킨스가 왼쪽 담장을 향해 3점짜리 대형 쐐기 홈런을 터트렸다. 한국은 8회 말 호주 마운드가 연속 볼넷으로 흔들리는 틈을 타 3점을 더하며 추격했지만, 이 홈런으로 벌어진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선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간 토미 현수 에드먼이 2사 후 2루 도루를 시도하다 실패해 그대로 경기가 종료됐다.
찰나의 주루 플레이 실수로 아웃된 강백호는 패배 후 그 어느 선수보다 거센 비난을 받았다. 국내 야구팬들은 "삼진, 병살도 아닌 세리머니사(死)다", "국제 망신이다", "호주에 패한 것보다 이런 플레이가 더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프로 선수라고 할 수 없는 플레이" 등 입을 모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외신들도 한국의 충격적인 패배보다 강백호의 아웃 장면에 더 주목했다. 야구 선수의 '기본'을 망각한 플레이로 순식간에 경기의 흐름을 상대에 넘겨줬다고 판단해서다. 이 경기를 중계한 미국 폭스스포츠는 트위터에 해당 장면을 편집한 영상을 올리면서 "놀랍다. 강백호가 세리머니를 하느라 베이스에서 발을 뗐다"고 썼다. MLB닷컴도 한국의 패전 소식을 전하면서 "호주 2루수 글렌디닝은 7회 초 3점 홈런에 이어 7회 말 2루에서 발을 뗀 강백호를 태그 아웃 처리하며 이날 승리를 이끌었다"고 전했다.
일본 매체들도 강백호의 플레이를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스포츠닛폰은 "강백호가 너무 기쁜 나머지 베이스에서 발을 떼는 실수를 했다"며 "한국은 이 실수로 호주에 패했고, 아울러 투수를 7명이나 투입하면서 전력에 타격을 받았다"고 했다. 닛칸스포츠도 강백호의 아웃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한국은 이 플레이로 흐름을 잃었다"며 "첫 경기에서 통한의 실수로 승리를 놓친 한국은 10일 일본전에서 배수의 진을 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의지의 홈런, 김광현의 난조
호주전 패배로 한국 선수단의 압박감은 더 커졌다. 가뜩이나 관심이 집중되는 한일전에서 전력상 몇 수 위인 일본 최정예 대표팀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인데, 이젠 승리까지 절실한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렸기 때문이다. 한국은 결국 대표팀 투수 최고참인 왼손 에이스 김광현을 일본전 선발 투수로 낙점했다. 당초 이번 대회에선 김광현을 불펜으로 기용하려 했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부터 오랜 기간 '일본 킬러'로 활약해온 그의 경험과 무게감에 다시 한번 기대기로 했다. 일본은 예정대로 메이저리그(MLB)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뛰고 있는 베테랑 빅리거 다르빗슈 유를 선발 투수로 내보냈다.
이번에도 경기 초반에는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한국 선발 김광현은 2회까지 아웃카운트 6개 중 5개를 삼진으로 채우면서 일본의 왼손 강타선을 무력화했다. 1회 말 1사 후 곤도 겐스케를 헛스윙 삼진 처리했고, 일본의 슈퍼 스타 오타니 쇼헤이도 풀카운트에서 바깥쪽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이끌어내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2회 말엔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에서 일본인 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56개) 기록을 세운 선두 타자 무라카미 무네타카에게 직구를 던져 루킹 삼진으로 아웃시켰다. 다음 타자 요시다 마사타카의 내야 땅볼 때 2루수 토미 에드먼의 1루 송구 실책으로 1사 2루 위기를 맞았지만, 다시 후속 타자 오카모토 가즈마와 쇼코 마키를 연속 삼진으로 아웃시켜 실점을 막았다.
그사이 한국은 다르빗슈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절치부심한 강백호가 포문을 열었다. 3회 초 선두타자로 나온 강백호는 다르빗슈를 상대로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쳤다. 그가 또 다시 2루로 다가가자 모두의 눈이 그의 발로 쏠렸다. 강백호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듯 2루를 힘주어 밟고 선 채 더그아웃의 동료들에게 팔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다음 타자 양의지는 볼카운트 1B-2S에서 다르빗슈의 4구째 슬라이더를 힘껏 걷어올렸다. 타구는 도쿄돔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 일본 관중으로 가득 찬 외야 스탠드 한복판에 떨어졌다. 호주전에서도 역전 3점포를 날렸던 양의지가 일본전에선 선제 2점 홈런으로 대회 두 번째 아치를 그렸다. 기세가 오른 한국은 2사 후 김하성이 상대 3루수 실책으로 출루해 2루까지 진출한 뒤 이정후의 우전 적시타 때 홈으로 파고들어 3-0 리드를 잡았다.
문제는 3회 말이었다. 리드를 안고 다시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이 갑자기 제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첫 두 타자인 겐다 소스케와 나카무라 유헤이를 연속 볼넷으로 내보냈다. 계속된 무사 1, 2루에서는 라스 눗바와 풀카운트 승부 끝에 중전 적시타를 맞아 1점을 내줬다. 다음 타자 곤도 역시 도쿄돔 가운데 담장을 바로 때리는 1타점 적시 2루타로 응수했다. 한국 벤치는 이어진 무사 2·3루에서 투수를 바꿨지만, 다음 투수 원태인이 요시다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아 끝내 역전을 허용했다. 한일전 선봉장의 중책을 맡았던 김광현은 결국 2이닝 4실점을 기록하게 됐다.
#운 아닌 실력으로 완패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몸이 풀린 일본 타선은 5회 말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선두타자 곤도가 우중월 솔로포를 쏘아올려 한 점 더 도망갔다. 1사 3루에선 요시다가 우익수 희생플라이로 3루 주자를 불러 들여 점수 차를 3점으로 벌렸다. 한국도 포기했던 건 아니다. 6회 초 1사 후 박건우가 일본 불펜 이마나가 쇼타의 시속 154㎞짜리 직구를 부드럽게 밀어 쳐 우월 솔로 아치를 그렸다.
그러나 6회 말 마운드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전세는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정철원, 김윤식, 김원중, 정우영 등 한국 불펜 투수들을 상대로 안타 4개, 볼넷 2개, 몸에 맞는 볼 1개를 얻어내며 대거 5득점했다. 7회 말에도 2점을 추가해 한국의 추격 의지를 확실하게 꺾었다. 한국 입장에선 9점 차로 경기를 끝내 이번 대회 첫 콜드게임(5회 말 15점, 7회 말 10점 차) 패배의 수모를 면한 게 다행일 정도다. 다양한 유형의 한국 투수 10명이 릴레이로 마운드에 올랐지만, 일본 타선의 집중력을 막아내지 못했다.
MLB닷컴은 "한국 투수들은 그 어떤 직구, 그 어떤 변화구로도 일본 타자들을 제압하지 못했다"며 "경기 초반 3-0으로 앞서 나가기도 했지만, 투수들이 무너지면서 경기가 기울어졌다"고 꼬집었다. 또 "두 명의 메이저리거(김하성, 에드먼)와 수퍼 스타 이정후를 보유한 한국이 일본과 함께 8강에 진출할 것으로 보였지만, 이젠 1라운드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썼다.
일본은 어차피 이기기 어려웠던 상대다. 매번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강한 팀이고 이번 대회에선 특히 역대 최강의 전력을 꾸렸다. 한국이 일본에 지는 건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넷을 남발하다 콜드게임에 가까운 점수 차로 패하는 건 기대치를 한참 밑도는 결과다. 한국은 경기 중반부터 주도권을 일본에 완전히 빼앗긴 채 아웃카운트를 잡는 데만 급급했다. 일본 야구와 한국 야구의 실력 차가 이 한 경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마운드 경쟁력은 갈수록 격차가 더 벌어지는 모양새다. 한국은 호주전과 일본전에서 총 17이닝 동안 21자책점을 내줘 팀 평균자책점 11.12를 기록했다. 아시아 지역에서 1라운드를 먼저 시작한 A조와 B조 10개국 중 압도적인 최하위(10일 기준)다. 14년 만에 본선 무대를 밟은 남미의 파나마와 선수 대부분 생업을 따로 두고 취미로 야구를 하는 유럽의 체코가 역사적인 WBC 첫 승을 신고하며 돌풍을 일으키는 동안, 40년 넘게 프로야구 리그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은 또 뒷걸음질을 쳤다.
10년 넘게 대표팀을 지켜온 베테랑들은 이제 지친 기색이 완연하고, 세대 교체를 외치며 발탁한 젊은 선수들은 경험 부족으로 제구 난조와 헛스윙을 남발하고 있다. 한국 야구의 내리막길은 점점 가팔라지는 듯하다. 이강철 감독은 한일전이 끝난 뒤 "초반에 승기를 잡았는데 내가 투수 교체를 늦게 해서 운영에 실패한 것 같다"고 고개를 숙이면서 "일본이 잘한 것은 인정하되, 우리 선수들의 능력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좀 더 성장하면 앞으로 충분히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애써 희망을 찾았다. 대회 전 끊임없이 한국을 경계하던 구리야마 히데키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은 "최종적으로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지만, 야구의 어려움을 계속 느꼈다. 한국이 강팀이라 우리도 필사적으로 이기려고 했다"고 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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