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에 안보 관련 강연을 하러 갔을 당시 김현희와 최창아 씨. 둘은 몸집이 비슷해 최 씨가 옷을 사다 주면 김 씨에게 잘 맞았다고 한다. 사진제공=최창아 씨 |
나는 후배인 채명희 수사관에게 물었다.
“세이리?”
채명희 수사관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반문했다. 마유미도 놀랐지만 나와 채명희 수사관도 깜짝 놀랐다.
“금세 알아듣네.”
그러나 생리라는 한국말과 세이리라는 일본 말이 비슷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
“생리일이 언제야?”
나는 마유미에게 물었다. 마유미가 생리일을 가르쳐주어 나는 생리대를 사다주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중국 것보다 질이 좋네.”
마유미는 생리대를 살피면서 기뻐했다. 그러나 생리일이 지나도 쓰레기가 나오지 않았다. 조사실뿐 아니라 안기부 내에서의 쓰레기는 기밀이 새어나갈 것을 염려하여 모두 소각시키기 때문에 쓰레기를 수거했지만, 그녀가 사용한 생리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더니 책상 서랍 한 곳에 모아두고 있었다.
“이거 변기에 버리면 안돼요?”
마유미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변기가 막히면 안 되니 쓰레기와 함께 버리면 소각장에서 태운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마유미는 그제야 슬그머니 사용한 생리대를 내놓았다. 후에 들으니 공작원 생활을 하면서는 일일이 조그맣게 찢어서 변기에 버렸다고 했다. 조사실에서도 처음 몇 개는 찢어 변기에 버렸다고 했다.
‘원 세상에… 어떻게 생활이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나는 어이가 없었다.
마유미는 바레인에서 트레이닝복만 입고 왔기 때문에 그녀에게 옷이 필요했다. 아직은 그녀를 데리고 외출할 수가 없었다. 부국장이 나에게 그녀의 옷을 사오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녀와 체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과의 행정담당 직원과 함께 명동의 백화점에 가서 무난한 검정색 모직투피스와 흰색 블라우스, 점퍼와 바지, 속옷 등을 구입했다. 신발도 샀다.
키는 내가 조금 크지만 그래도 얼추 우리 둘의 체격이 비슷하고 발 크기도 같았기 때문에 그녀의 옷과 신발 등은 내가 입어보고 신어보고 사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 그녀의 옷은 내 취향에 맞춰 사게 되었는데 보수적인 안기부 분위기 때문에 늘 옷도 점잖은 것에 익숙해있던 내 탓에 그녀도 점잖고 어두운 옷만 입게 되었다.
“새 옷을 사왔으니까 입어 봐.”
나는 조사실로 돌아오자 그녀에게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얼른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내가 산 옷이지만 맞춤처럼 잘 맞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감사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김현희가 최창아 씨에게 보낸 카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라’는 김 씨의 덕담이 눈에 띈다. 사진제공=최창아 씨 |
김 선생이 날카롭게 추궁했다.
“아니에요.”
마유미는 아니라고 언성을 높였다.
“얘가 거짓말을 하는데?”
김 선생이 우리 수사관들을 향해 말했다.
“거짓말 아니에요.”
마유미가 대뜸 중국말로 반박했다. 차츰 그녀의 거짓 진술에도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수사국의 부국장은 오랫동안 일본에 파견되어 근무했던 사람으로 일본에 정통했다. 부국장이 한 번은 이런 그녀를 보고 빙긋이 웃으며 “우소 바까리(거짓말이야)”라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했다. 긍정하는 모습인 듯했다.
하루는 그녀의 책상 서랍에서 연필 깎는 도구와 연필을 발견했다. 그때는 아직 심문을 하기 전이라 그녀가 글을 쓸 일은 없었다. 수사관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그런데 아침에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가 연필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문틈으로 살피니 거울을 보면서 정성스럽게 눈썹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여권사진과 바레인에서 한국에 들어올 때 모습을 보면 그녀의 눈썹은 정리를 하다못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가끔 수사관끼리 그녀의 눈썹에 대해 말했고 그 당시 한국여자들은 눈썹을 짙게 칠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아마도 자신을 담당하던 여수사관들을 보고 자기 눈썹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어 그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저 상태에서 눈썹 그릴 생각이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것은 여자의 본능이었다.
우리는 차츰차츰 KAL기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은 이라크 주재 총영사 부부, 기장 4명, 부기장 4명, 항공기관사 4명을 포함한 대한항공 직원 20명, 외국인 2명 그 외에는 모두 돈 벌어 가족들을 호강시키겠다면서 열사의 나라에서 고생을 하다가 돌아오던 노동자들이었다. 심문실에도 TV를 설치해놓고 당시 상황이나 가족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사건이 얼마나 처참하며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것인가를 이야기했다.
그녀의 심정이 흔들리는 것같이 보였다. 중국어로 한참 심문하는 도중에 그녀가 갑자기 중국말로 뭐라고 물어왔다.
“오! 얘가 배신자에 대해 물어보는군.”
김 선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드디어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말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면서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산으로 치면 9부 능선쯤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네가 말하는 배신자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밝히는 것은 배신자가 아니라 용기 있는 자야. 배신자라는 말은 깡패집단에서나 자기들 조직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쓰는 말이야.”
주무수사관이 김 선생에게 말하고 통역하게 했다. 김 선생이 그대로 통역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닌 강요에 의해 한 일은 잘못이 없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그것을 밝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너도 한국에 와서 봤으면 알겠지만 북한에 속아 살아오지 않았나?”
우리는 긴장하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리는 답답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내가 사실을 말하게 되면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되나요?”
다시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물론 중국말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자백하면 북한에 있는 그녀의 부모를 포함하여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막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그녀에게 절망적인 답변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이미 사건이 일어났고 네가 말을 안 하면 북한은 사건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가족들을 다 해칠지 모른다. 하지만 네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오히려 가족들을 처치할 경우 북한은 자기네들이 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차마 가족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주무수사관은 억지 설득을 했다. 사건이 밝혀지면 북한에서 가족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가 자백을 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북한은 모든 사람을 집단 최면에 걸리게 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어. 너도 젊은 나이에 속아서 이런 일을 벌였으니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너도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한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지 않아? 지금 여기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많은 간첩들과 귀순자들이 잘 살고 있어. 네가 원한다면 만나보게 할 수 있어.”
주무수사관은 은근히 그녀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지금이 기회였다.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뭐지? 성이라도 알자.”
그녀의 입이 열렸지만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목 안에서만 자그마한 소리가 맴돌았다.
“뭐라고?”
주무수사관이 재촉했지만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주무수사관은 그동안 수고한 김 선생과 우리들을 모두 옆 조사실로 나가 있게 했다.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온 그녀로서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한테만 쏠려있어 속내를 털어놓기가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옆방은 수사관들이 수사상황을 정리하고 보고하는 방으로 그녀의 방에 설치해 놓은 CCTV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CCTV를 통해 계속 심문상황을 지켜보았다.
김현희가 마침내 입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