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이차전지 소부장 기업만 160여 곳…중국도 벅찬데 미국·유럽도 참전
우리나라는 일본·중국과 함께 이차전지 강국으로 꼽힌다. 정경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에너지저장연구센터장 등 4명이 쓴 ‘이차전지 승자의 조건’에 따르면 현재 이차전지로 불리는 리튬이온전지 상용화는 일본이 주도하며 2010년까지 세계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시장 판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일본 기업은 원통형 배터리를 생산했다. 스마트폰에 적용하기에는 부피 부담이 컸다. 반면 우리나라와 중국은 각형·파우치형 타입에 선제적으로 투자했다. 애플은 중국 업체인 ATL, 삼성전자는 삼성SDI, LG전자는 LG화학 제품을 이용했다. 스마트폰이 전 세계인이 1대 이상 들고 다니는 제품이 되면서 우리나라가 이차전지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이차전지 완제품을 판매하는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을 기반으로 이차전지 관련 소재·부품·장비(소부장)를 납품하는 업체들이 생겨났다. 소재별로 살펴보면 양극재를 생산하는 국내 기업은 에코프로비엠, 엘앤에프, 포스코퓨처엠(구 포스코케미칼), 코스모신소재, LG화학 등이 있다.
양극재 제조의 핵심 원재료인 황산니켈을 생산하는 KG케미칼, 수산화리튬과 황산니켈을 제공하는 웰크론한텍, 양극재용 나노분말 첨가제를 제공하는 미래나노텍, 양극재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에 필요한 가성소다를 공급하는 백광산업, 양극재 생산용 열처리 장비를 제공하는 원준 등이 있다.
음극재는 포스코퓨처엠이 생산하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은 양극재와 음극재를 동시에 생산하는 국내 유일 기업이다. 포스코퓨처엠은 천연흑연 기반 음극재를 생산한다. 대주전자재료, SK머티리얼즈, 한솔케미칼은 차세대 음극 재료로 불리는 실리콘으로 음극재를 만들고 있다.
분리막은 SK아이이테크놀로지와 WCP가 대표적이다. 대한유화는 분리막의 원재료인 폴리머를 생산한다. 전해액은 엔켐, 솔브레인, 동화기업 등이 주요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고, 전해질 관련 업체로는 후성과 천보가 있다. 덕산테코피아는 전해액의 필수 구성 요소인 특수 유·무기 첨가제를 전문으로 생산한다.
한국배터리산업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이차전지 관련 회원사는 163곳에 달한다. 앞으로 이차전지 분야를 먹거리로 선택할 업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도 대부분 업체가 이차전지 관련 사업을 다른 사업과 ‘겸업’하고 있을 만큼 소부장 분야에서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 아니다.
이를테면 2021년 상장한 지아이텍은 공정 중 양극재와 음극재를 균일하게 도포되도록 코팅하는 장비인 ‘슬롯다이’를 제조하는 업체지만 디스플레이 산업 공정에 필요한 ‘슬릿 노즐’을 생산하기도 한다. 엔시스 역시 이차전지 생산 공정별 ‘머신비전 검사장비’와 태양전지 셀 및 모듈 제조설비 장비 등을 동시에 생산한다. 레이저쎌도 이차전지 외에도 반도체·디스플레이 시장에 키징 공정 중 면광원 에이리어 레이저 기술이 적용된 장비를 납품 중이다.
해외에서도 이차전지 주목도는 늘고 있다. 특히 중국 업체들의 선전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우리나라는 양극재 재료로 NCM(니켈·코발트·망간) 등을 사용하는 삼원계 배터리를 주력으로 성장한 반면 중국은 양극재 재료로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LFP 배터리는 삼원계 배터리보다 가격이 약 30% 저렴하다. 안정성도 삼원계 배터리보다 높아 화재가 일어날 확률이 낮다. 그러나 LFP 배터리는 삼원계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가 낮고 동일 크기 대비 무게가 무거워 차량 주행거리가 줄어든다는 단점이 커 그동안 전기차에 사용되지 못했다. 중국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중국은 LFP 배터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결과가 CTP(Cell to Pack) 기술이다. ‘셀-모듈-팩’의 구조를 갖는 이차전지에서 모듈을 삭제해 셀을 바로 팩에 연결하는 기술이다. 전문가들은 CTP 기술을 적용한 배터리는 에너지 밀도를 최대 20% 향상한다고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2020년까지만 해도 1위 CATL(24.6%)와 2위 LG에너지솔루션(23.4%) 격차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SNE리서치가 30일 발표한 ‘2023년 1~2월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에 따르면 1위 CATL은 33.9%로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다. 그러나 LG엔솔은 13.3%로 점유율이 낮아졌고, 심지어 중국의 BYD(18.2%)에 2위 자리까지 내줬다. CATL과 BYD의 점유율만 50%를 넘는 반면 한국은 5위 SK온(5.5%), 6위 삼성SDI(4.9%)의 점유율을 모두 더해도 23.7%에 불과하다.
중국 업체들은 삼원계 배터리 상용화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해 CATL은 삼원계 배터리 출시를 공식화했다. 이차전지업계 한 관계자는 “CATL이 LFP 배터리에만 적용될 것으로 예상했던 CTP 기술을 삼원계 배터리에도 적용하면 삼원계 배터리 시스템 에너지 밀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며 “삼원계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이 점유율을 확대해 나간다면 우리나라 배터리 3사의 점유율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국내 배터리 3사는 이제야 LFP 배터리 시제품을 공개했다. SK온과 LG엔솔은 최근 열린 ‘인터배터리 2023′에서 LFP 시제품을 공개했다. SK온은 저온 시 짧아지는 주행거리를 70~8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LG엔솔은 에너지저장장치(ESS)용 LFP 배터리를 공개했다. 최윤호 삼성SDI 사장은 지난 15일 정기주주총회에서 “LFP 배터리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블룸버그통신은 2030년까지 업계 상위권을 중국 업체들이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코넥스 뉴 에너지(Cornex New Energy) 등 새로운 중국 생산자들이 전면에 등장할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중국의 생산 능력은 2030년까지 현재 수준의 약 3.5배인 6668GWh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전 세계 예상 생산량의 약 69%에 해당한다. 블룸버그통신의 자료에 따르면 2030년 이차전지 시장 점유율 상위 10위권에 삼성 SDI, SK온 등은 없다.
미국, 유럽 등에서도 경쟁업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LG엔솔은 상장 당시 “스웨덴의 이차전지 제조업체인 노스볼트는 2021년 3월 폭스바겐과 140억 달러의 주문 계약을 체결하고, 2021년 6월에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인 볼보와 연간 50GWh 규모의 합작 배터리공장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하는 등 유럽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며 신규 후발업체의 진입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유럽 등 곳곳에서 중국 견제를 위한 정책을 펼칠 조짐도 보인다. 자칫 이들의 싸움에 우리나라 업체들이 휘말릴 수 있다. 이미 불안한 기미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영향으로 미국 시장에서 한국의 전기차와 이차전지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황 연구위원이 작성한 ‘IRA의 국내 산업 영향과 시사점 : 자동차와 이차전지 산업을 중심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차 북미에서 최종 조립이 이뤄지고, 배터리 핵심 소재가 일정 비율 이상 미국 또는 미국의 FTA 체결국에서 추출·처리돼야 하며, 일정 비율 이상의 배터리 부품이 북미에서 제조·조립돼야 세액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 판매하는 국산 전기차는 국내 수출을 통해 공급하는 실정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조지아주에 약 30만 대 규모의 전기차 전용 공장을 짓기로 했으나 2025년 이후부터 가동될 예정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완성차 제조업체들은 세액 공제 혜택을 받지 못해 타 완성차 제조업체에 가격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다. 이차전지 시장 타격도 불가피하다.
다만 올해 초 미국 재무부가 배터리 소재·부품의 추출·가공·조립·제조 비율을 수정하면서 국내 업체들은 한시름 놓게 됐다. 소재와 부품을 개별이 아닌 전체 공급망 기준으로 판단하고, 비FTA 체결국에서 추출한 소재라도 FTA 체결국에서 가공해 50% 이상 부가가치를 창출하면 보조금 혜택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은 유럽판 ‘IRA’ 초안이 16일(현지시간) 공개했다. 2030년까지 제3국 원자재 의존도를 전체 소비량의 65% 미만으로 낮추고, 전기차 배터리 기술에 대한 유럽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2030년까지 40% 이상 끌어올리기로 했다.
알렉산더 스트라이프 노스볼트 부사장은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더 배터리 컨퍼런스 2023’에서 “IRA처럼 EU도 배터리 내재화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올해 여름쯤 적용될 텐데 생태계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 다만 산업통상자원부는 “핵심원자재법 초안은 IRA와 달리 역외 기업에 대한 차별적인 조항이나 현지 조달 요구 조건 등은 포함하고 있지 않고, 탄소중립산업법도 EU 역내 기업과 수출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나라에는 피해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는 “전 세계가 이차전지가 에너지 산업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체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업체들의 점유율과 지배력은 낮아지고 있다”며 “향후 1~2년은 그동안 지속해온 관성으로 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높지만 2024, 2025년쯤에는 전방산업의 선택을 받지 못 하는 상황이 도래할 것”고 내다봤다.
박찬웅 기자 rooney@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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