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30일 삼성가 상속재산을 둘러싼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사진) 등과 이건희 삼성 회장의 첫 공판이 열렸다. 이 전 회장은 중소기업을 이끌며 재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
삼성그룹에서 이맹희 전 회장의 마지막 직함은 ‘부사장’이었다. 그가 쓴 <묻어둔 이야기>에 따르면 1973년 여름께 17개 계열사의 여러 타이틀 중 삼성전자·삼성물산·제일제당 부사장직만 남겨놓고 다 내놨다. 얼마 뒤 그는 나머지 부사장 직에서도 물러나며 야인으로 살았다.
그렇게 20년여가 흐른 1993년 6월 9일 삼성그룹은 사장단회의를 열고 제일제당(현 CJ그룹)을 분리하는 등 14개 계열사 정리를 발표한다. 제일제당은 이맹희 전 회장 부인인 손복남 씨가 인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맹희가(家)의 몫이 된 셈이다. 당연히 이 전 회장의 경영 복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당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재로서는 큰아들 이재현 삼성전자 이사가 제일제당의 경영을 모두 책임질 것이기 때문에 제가 회사 경영에 복귀할 생각은 없습니다”고 단언했다. 이어 그는 삼성그룹과 관련 없이 제일비료를 설립해 회장으로 취임했다면서 사업가로 재기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이미 2개월 전 시작된 계열분리 협상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설립을 주도한 제일제당 컴백이 가능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비료회사를 만든 셈이다.
법인등기부(폐쇄)에 따르면 제일비료는 원래 1992년 10월 30일 자본금 5000만 원으로 설립된 ‘남경전자’라는 전자부품회사였다. 설립 당시 사업목적은 ‘전자부품 제조 및 판매업’. 이 회사는 제일제당 계열분리 발표 직전인 1993년 6월 1일 상호를 제일비료로, 14일에는 사업목적도 ‘비료제조업 및 판매업, 비료수출입업, 식물재배 및 연구사업’으로 변경하며 비료회사로 탈바꿈한다.
이맹희 전 회장이 동생 이건희 회장의 삼성전자와 대항(?)하기 위해 전자회사를 세웠다가 여의치 않자 비료회사로 변경한 것인지, 아니면 회사 설립을 용이하기 위해 기존 법인을 인수해 비료회사로 변경한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비료회사로 변경된 후인 1993년 7월 15일에야 이사로 취임(16일 등기)한 점으로 미뤄 후자 쪽이 좀 더 설득력을 얻는다.
1960년대 한국비료 설립 과정에서 ‘사카린 밀수사건’ 등으로 곤욕을 치른 그다. 왜 하필이면 비료회사였을까. 1993년 7월 이 전 회장이 펴낸 경영단상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그는 “오늘날 우리의 땅은 이제 더 이상 피폐해질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다. 땅이 죽어간다는 절박감은 나에게 유기질비료를 만들어야겠다는 거의 강박관념과도 같은 결심을 하게 했다”면서 “최종적으로는 공업경영학을 공부했지만 농과대학(일본 도쿄) 출신이기도 한 사실은 나에게 유기질비료를 만들 수 있는 기술적 여건을 마련해준 셈”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 전 회장은 제일제당 종합연구소 연구팀으로부터 효모에 관한 자료를 얻고 일본 농과대학의 동기생이 효모의 성능 실험을 실비로 진행해 주는 등 주변의 도움도 받으며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비즈니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한 유기질비료 전문가는 “1990년대 초, 서울올림픽 이후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기질비료는 유망한 사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전 회장이 책에서 짧게 기술한 사업 계획을 살펴본 이 전문가는 그러나 “저자는 비료관리법 등 현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면서 “그대로 진행한다면 사업이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했다.
말 한마디면 움직이는 조직을 거느린 재벌가 황태자였던 그에게 중소기업의 열악한 현실 자체도 녹록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은 책에서 “유기질비료 공장을 내 땅에 세우려고 하는데도 무려 80개 이상의 도장이 필요했고, 게다가 얼마간의 융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니 무려 20여 곳의 관청이나 그 관청과 유사한 기관을 드나들어야 했다”며 “그러고도 현재까지 가시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러한 상황은 1년 가까이 지난 1994년 6월이 돼서도 별로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아니 더 악화됐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일요신문>과의 단독인터뷰에서 “없는 살림에 매달 5000만 원에 가까운 돈만 까먹고 있다”고 털어놨다. <일요신문> 기자가 찾아갔을 때 그는 대구 근교 농장에 겨우 분재를 모아둘 유리온실을 만드는 중이었다.
이 전 회장 본인의 말에 따르면 제일비료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삼성그룹이나 아들 이재현 회장이 막 독립경영을 시작한 제일제당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없었다. 그는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건희한테는 내가 형이라 그런지 입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예전에 건희가 ‘형은 형이고 사업은 사업인 만큼 공사에 구분을 두자’고 말한 적이 있어 더욱 그렇다. 또 아들에겐 괜히 부담을 주기 싫고 해서 말을 안 한다”고 밝혔다.
지지부진한 사업은 끝내 진척이 없었던 듯하다. 1994년 7월 7일 이사 두 명의 사임과 취임(16일 등기)을 끝으로 법인등기부상 전혀 활동이 없었던 것. 마지막 등기 이후 5년간 활동이 없으면 해산으로 간주하는 상법 제520조에 따라 제일비료는 결국 1999년 12월 15일 휴면회사가 됐고 다시 3년이 지난 2003년 12월 1일 아예 청산종결됐다.
“나는 확신한다. 이 땅을 더럽힐 것들을 모아서 효모 제조의 기술을 이용하여 이 땅을 되살릴 유기질비료를 만들면, 다른 어느 기업 못지않게 용인의 자연 풍치를 아꼈던 아버지도 지하에서나마 나를 칭찬하시리라고.”
이 전 회장은 비료사업을 시작하며 책에 이렇게 썼다. 잘됐으면 지금쯤 CJ의 한 계열사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명예회복을 했을 터. 그런 그의 마지막 사업은 실패로 끝났고 ‘전 제일비료 회장’라는 직함으로만 남아 이맹희라는 이름을 수식해주고 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