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할머니는 스물두 살에 전쟁 과부가 되었단다. 유복자로 태어난 딸이 돌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60년을 홀로 살아오셨다는 할머니가 6월 현충일 특집 프로에 나왔다. 자식도 없어 재가를 생각해 봤지만 선을 보던 날 빛 좋기만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할머니가 인상적이었다. 유해도 찾지 못하고 묘지도 없는 남편이건만 그는 할머니와 세상을 연결하는 중요한 끈인 듯했다. 세상을 떠나 한글 비석으로 남을 때 남편 이름을 나란히 적고 싶다고 조카에게 유언을 남겼단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 죽어서라도 이루고 싶다는 소망은 그 여인이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지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탈 대로 다 타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의 노래가 찡하면서도 익숙했다.
왜 익숙했을까. 생각해 보니 우리 외할머니도 그렇게 살다 가셨다. 외할머니는 전쟁 과부였다. 그때 나는 겨우 서른여덟이었어! 외할머니에게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열일곱에 서른여덟은 ‘겨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외할아버지를 본 일이 없는 내겐 그건 그저 푸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그 실감나지 않은 푸념 속에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존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전쟁 중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삶을 진흙탕으로 밀어낸 원수이면서 동시에 탈 대로 다 타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이 되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은 20세기 중반 대한민국에서는 익숙한,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가장 실존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역사적인 것이라는 문장을 절로 암기하면서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전쟁과 가부장적인 문화가 만들어낸 가족사를 추억했다. 나는 동족끼리 기막힌 전쟁을 해야 했던 우리의 역사에 화가 났고, 이삼십 대에 홀로 된 여인들이 평생 홀로 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가부장적 문화에 화를 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모진 세월을 견디다 화석처럼 늙어버린 여인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이제 이념을 지우고 역사를 지우고 평가를 지우게 되니 그렇게 살아온 할머니들의 삶을 존중하게 된다.
돌아가실 무렵 할머니는 할아버지 얘기를 많이 했다. 저승길에서는 꼭 찾을 거라고 했다. 이모가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알아볼 수나 있겠냐고 똑똑한 소리를 하면 왜 알아보지 못 하겠냐, 거기가 내 죽을 자린데,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때는 말도 안 되는 그 대화들에 웃음만 났지만 때 그 할머니의 말과 표정은 강렬하게 남아 아무 때나 문득 문득 떠오른다.
매년 현충일은 할머니 제사다. 음력을 쓰는 우리들이 할머니 제사만 양력으로 지내는 것을 보면 그건 현충일 다음 날 돌아가신 할머니 뜻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사람은 분명 자기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 그곳은 한이 풀리는 자리이기도 하고, 운명을 수긍하게 만드는 자리이기도 하고, 화두가 풀리는 자리이기도 할 것이다. 거친 역사의 뒤에서 눈물 흘리고 한숨 쉬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명복을 빈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