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부여와 믿음으로 선수 장점 끌어내고 팀 결속…강요 아닌 선택지 제시 통해 오타니 ‘이도류의 길’ 도와
일본은 매년 ‘이상적인 상사’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그런데 “올해 1위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구리야마 히데키 감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선수별 장점을 이끌어내는 절묘한 기용술로 사무라이 재팬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과거 WBC 일본대표팀 감독들과 비교하면, 구리야마의 선수 시절 성적은 아무래도 뒤처진다. 1회 대회 왕정치, 2회 대회 하라 다쓰노리, 3회 대회 야마모토 고지, 4회 대회 고쿠보 히로키 감독은 모두 아마추어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고, 프로 입성 후에도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들이었다.
반면, 구리야마는 드래프트 번외로 일본프로야구(NPB)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가까스로 입단했다. 그마저도 메니에르병(평형감각을 잃는 난치병)에 시달리며 29세에 일찌감치 유니폼을 벗었다. 2019년 구리야마 감독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프로야구 세계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낮은 입장이었다”며 선수 시절을 돌아보기도 했다.
사실 구리야마는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대학 시절 야구부에서 활약했으나 학업을 병행해 교사 자격증을 딴 바 있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에는 방송해설자로 나섰으나 해설을 하면서도 공부를 병행해 하쿠오대학 교수까지 됐다. 바탕에 깔려있던 것은 언제나 야구에 대한 애정과 인간학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이었다.
2012년에는 니혼햄 파이터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많은 이들이 “코치 경험이 전무한 구리야마가 고전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보란 듯이 그는 사령탑 첫해 우승을 일궈냈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팀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소속팀 전체 선수의 성격과 특징, 전략 등 승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노트에 꼼꼼하게 적어두고 응용했다. 2016년에는 애제자 오타니 쇼헤이의 완봉승으로 두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2023년 일본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WBC에서 7전 전승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써냈다.
오랫동안 일본 야구계는 ‘나를 따르라’는 카리스마형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 권위와 지식으로 통솔해 가는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리더십이 롤모델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구리야마는 어느 쪽도 아니다. 오히려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모티베이터’에 가깝다. 의욕을 끌어내고 팀이 활기차게 뭉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카리스마형이나 통솔형이 아닌, 융화형 리더다. 이 같은 구리야마 감독의 인재관리법은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강요하지 않고 선택지를 제시한다
2012년 구리야마 감독은 특별한 인연을 만난다. ‘야구천재’ 오타니 쇼헤이다. 고교 졸업 후 메이저리그(MLB)로 직행하려던 오타니를 설득해 니혼햄 유니폼을 입힌 인물이 바로, 구리야마 감독이었다. 오타니를 영입할 당시 그는 마음속으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하나는 ‘니혼햄에 오라’고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메이저리그에 가지 말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과거 사례나 데이터를 상세하게 제시하고, 니혼햄을 거쳐 꿈을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제시했다. 오타니의 꿈을 존중해 그가 이도류로 나설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운 것이다.
WBC 우승 후 구리야마 감독은 니혼TV에 출연해 비하인드를 밝혔다. 오타니 선수에 대해 구리야마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며 신뢰감을 나타냈다. 또한 “니혼햄에 입단했을 때 오타니를 투수와 타자 어느 쪽으로 더 육성할 계획이었는지”를 묻자 “정말 한 번도 (오타니가) 이도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며 “오타니라면 반드시 투타 양쪽에서 성과를 낼 거라고 믿었다”고 자신 있게 즉답했다.
② 책임을 부하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질책해서 선수의 의욕과 자존심이 꺾이면 오히려 역효과다. 나무랄 일이 있으면 별실에서 일대일을 원칙으로 한다. 특히 구리야마는 보도진 앞에서 “내 탓이다”라는 자세를 관철했다. 과거의 명장, 노무라 가쓰야는 패전 후 실수한 선수를 꾸짖어 종종 기사화됐다. 다음 날 아침 지면을 보고 선수가 분발하는 것을 노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요즘 선수들에게 일방적인 리더십은 통하기 어렵다. 이번 WBC 일본야구 대표팀의 평균 연령은 27.3세로 역대 대회 최연소였다. 2000년 이후 출생 선수만 5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문제는 내 책임’이라고 인정하는 구리야마는 ‘젊은 세대의 감성에 맞는 리더’라는 평가가 많다.
③ ‘믿음의 야구’ 선수를 믿고 기다린다
WBC에서 구리야마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던 무라카미 무네타카를 주전으로 계속 기용했다. 준결승 멕시코전. 1점 차로 끌려가던 일본은 9회말 무사 1, 2루 기회를 맞는다. 그리고 무라카미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날도 그는 4타수 무안타였고 희생번트까지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구리야마 감독은 코치를 통해 무라카미에게 이렇게 전했다. “무네(무라카미 애칭)에게 맡긴다. 마음껏 휘두르고 와라.”
결과는 좌중간 2점 적시타. 무라카미가 구리야마 감독의 믿음에 화답한 것이다. 일본은 극적인 승리를 거뒀고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회생한 무라카미는 미국과의 결승전에서도 2회말 동점 솔로 아치를 그렸다. 위기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으로 무라카미를 한층 크게 성장시켰다. 다만, 믿음이란 마냥 기다리는 걸 뜻하진 않는다. 구리야마 감독은 “선수와 양방향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윗사람이 ‘어떻게 하길 바라는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의사를 전하고 무릎을 낮춰 서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④ 주장을 두지 않은 수평적 조직
“캡틴을 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스스로 ‘캡틴’이라고 생각하면 플레이는 달라질 것이다. 나이도 실적도 상관없다.” 2월 캠프 첫날, 구리야마 감독은 대표팀에 이렇게 전했다. “모두 일류 선수이므로 각 선수의 자각에 맡기겠다”는 설명이었다. 그러자 36세 최연장자인 다르빗슈 유가 솔선수범해 젊은 선수들의 중압감을 달래줬고, 오타니는 대전 상대가 되는 메이저리거들의 정보를 공유하는가 하면, 곤도 겐스케 등의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결속력이 단단해졌으며 무엇보다 밝은 팀 컬러가 조성됐다.
단기전과 장기전은 팀 구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니혼TV는 “이번 단기전의 경우 ‘리더적인 존재’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선수 각자가 자신의 특성을 자각하고 제 역할을 다한 것이 큰 플러스 효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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