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뜨거운 전시 중의 전시, 그것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We’일 것이다. 리움미술관은 카텔란의 작품에 대해 “무례하고 뻔뻔한 태도로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고, 우리 인식의 근간을 순식간에 뒤엎어 버렸다”고 소개한다.
카텔란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1억 5000만 원(12만 달러)짜리 바나나”하면 “아!”라는 탄성이 날 것이다. 벽에다 성의도 없이 공업용 테이프로 바나나를 붙여놓은 게 작품이라니, 그 작품에 12만 달러를 지불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리고 그 비싼 바나나를 벽에서 떼어내 아무렇지도 않게 먹어치운, 유일하게 상식적인 사람까지! 거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이상하고 불편한 진실은 무엇일 것인가.
어쩌면 그 바나나는 카텔란의 세계로 초대하는 코미디인지도 모른다. 엉뚱한 것 혹은 짓을 통해 고정관념을 깨는! 아마도 예술에서 그 시조는 20세기 미술의 랜드마크이자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샘’이 아니었을까.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전시해놓고 ‘샘(Fountain)’이라 이름을 붙였다. 변기가 샘이라니, 그것은 사건이었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움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사건이었다.
아름다운 것이 따로 존재해서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술은 혁명이어야 했다. 내 눈을 열어주고 내 감각을 열어서 ‘나’를 바꾸는 그것, 그것이 예술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카텔란의 작품은 상식을 깬다. 그나마 편하게 빠져들 수 있는 카텔란의 작품 중에 내 눈길을 끈 것은 ‘아버지’다. 카텔란은 자신의 발바닥을 찍어 노동에 지친 발바닥으로 ‘아버지’를 형상화했다. 극사실적으로 확대된 발바닥은 아버지로서 살아온 사람들의 무게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그의 중심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의 중심의 힘은 그가 ‘어머니’라 이름붙인, 투박하고 거친 손의 기도, 기도하는 손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낡은 부츠 속에 담겨진 흙속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이름 모를 풀이 보인다. 이름 모를 풀은 이름이 없는 풀이 아니라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풀이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없는 풀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존재감이 없는 풀이라고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흐의 낡은 부츠를 연상하게 하는 그 풀은, 누군가가 신다버린 부츠를 마다하지 않고 햇빛 좋은 창가에서 햇빛을 달게 삼키며 잘 자라고 있다. 그것이 강인함이 아니라면 무엇이 강인함일까.
그 생명력에 감동하고 나니 운석을 맞고 쓰러져 누운 교황의 ‘아홉 번째 시간’이 다시 보인다. 어찌하여 운석은 감히 교황을 쓰러뜨렸을까. 아니, 운석은 교황과 노숙자를 차별하지 않고 그저 떨어졌을 뿐인데 우연히 교황이 맞은 것일 것이다. 그 사건이 교황에게 불운일 것인가,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인가. 카텔란은 무엇을 의도했을까. 운석을 맞고 쓰러져 있으면서도 교황의 지팡이를 놓치지 않고 꽉 부여잡고 있는 모습에 카텔란의 의도가 들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작품이 ‘나’를 자극해서 때로는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주기도 하지만 예술을 읽는 방식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고. 우리는 우리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작품을 읽고 받아들일 자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선은 시시콜콜한 모든 사건들까지 모든 사람에 회자될 수밖에 없는 공인들의 부자유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그들을 지켜주었던 페르소나가 그들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페르소나는 사회에서 ‘나’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나’를 위선과 콤플렉스 속에 가둔다. 거기에서 자유를 찾아 성장하는 것은 오롯이 자기 몫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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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