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7월 8일 항소심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대법정으로 들어가는 김현희. 연합뉴스 |
▲ 같은 해 <동아일보> 3월 7일자 신문은 통곡하는 KAL기 유가족들의 모습을 실었다. |
김현희는 노동자들이 들뜬 표정으로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공작 임무가 저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김현희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폭약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자신도 모르게 선반으로 눈이 자주 갔다.
“선반을 쳐다보지 마.”
김승일이 짤막하게 말했다. 김현희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음료수와 식사가 나왔다. 김현희는 내색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면 발각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서양인과 김현희가 먼저 화장실을 갔다가 오고 10분 후에는 김승일도 화장실에 다녀왔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여행이 지루했는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현희는 긴장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승일은 태연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바그다드를 이륙한 비행기가 마침내 아부다비에 착륙했다. 김현희는 김승일과 함께 폭발물이 든 비닐 주머니를 선반 위에 그대로 남겨둔 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행용 가방만 들고 내렸다.
비행기를 내릴 때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승객들 중 누군가 폭탄을 가지고 내릴지도 알 수 없었고 승무원들이 발견하여 치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김현희는 승무원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제부터는 아부다비를 탈출하기 위해 환승 홀에서 기다려야 했다.
김현희는 일단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내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 비행기가 하늘을 날다가 폭발해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무사히 탈출하여 평양으로 돌아가면 인민영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아부다비 공항으로 나오자 공항안내원이 환승행 비행기 표를 보자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행 비행기 표를 보여주었다. 아부다비는 일본 여권으로는 통과밖에 할 수 없고 출국도 비자가 없어서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비행기 표도 통과하는 것을 보여주어야지 다른 비행기 표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동안에 아부다비에 착륙했던 KAL기는 이륙하여 서울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아부다비 공항에서는 친절을 베풀어 여권과 비행기 표를 자기들이 간직했다가 아침 9시가 다 되어서야 바레인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체크인해서 보딩카드를 내주었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위장 여정으로 설정되었던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위장 여정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겠어.”
김승일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마를 거쳐 빈으로 가는 여정이 불발이 된 것이다.
“오늘 로마로 못 가요?”
“갈 수 없어.”
김승일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김승일도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빈까지만 무사히 가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29일 아침 9시 바레인행 비행기를 타고 2시간 후인 11시경 마나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표 때문에 바레인에서 로마로 바로 갈 수 없었다. 공항에서 30달러를 내고 3일간의 임시 사증을 받았다. 김승일은 생각이 많았다. 예정과 달라졌기 때문에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머물기 위해 공항에 있는 전화로 호텔을 찾았으나 좀처럼 통화가 되지 않았다.
“도와 드릴까요?”
그때 공항경찰 한 사람이 다가왔다.
“호텔을 잡아주면 고맙겠소.”
공항경찰은 여러 호텔에 전화를 걸어 리젠트호텔을 찾아 연결을 시켜 주었다. 김현희는 지은 죄가 있어서 공항 경찰이 두려웠다.
김승일이 전화로 방 예약을 한 다음에 택시를 타고 리젠트 호텔로 달려갔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김현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승일에게 물었다.
“괜찮아.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할 테니까 우리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를 거야. 그들이 눈치를 채려면 적어도 2, 3일은 걸릴 거야. 그때는 우리가 이미 평양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소용없는 거지.”
김승일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바레인은 중동국가라 날씨가 후텁지근했다. 김승일은 자주 시계를 보았다. 점점 비행기가 폭발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그다드에서 시계를 9시간 후에 맞춰 놓았기 때문에 2시가 넘어야 폭발할 것이고 KAL기는 지금쯤 태국 근처를 날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나먼 중동 국가에서 비행기가 어찌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여기는 너무 덥군.”
김승일은 호텔에 도착하자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날씨가 더웠고 여행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날은 외출을 하지 않았다. KAL기 폭파에 대한 긴장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튿날은 11월 30일이었다. 호텔에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관광을 하기로 했다. 빈에서 산 원피스를 입고 리젠트 호텔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아부다비는 빈이나 베오그라드처럼 아름다운 도시는 아니었다. 그래도 번화가에 상점들이 즐비했다. 김승일은 관광을 하면서 와이셔츠를 산 뒤에 알리아 항공사에 가서 전에 예약했던 아부다비∼로마행 비행기표를 1일 출발 바레인∼암만 경유∼로마행으로 바꾸었다.
오후에는 택시를 타고 바레인을 관광하며 사진을 찍었으나 날이 어두워져서 바깥에서 빵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호텔 음식이 맞지 않아 빵으로 저녁식사를 대신 했다. 그러나 저녁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호텔 카운터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여권의 이름과 생년월일 여권 번호 등을 물었다. 김승일이 영어로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무슨 전화예요?”
“호텔 카운터에서 온 전화야. 여권번호와 이름을 물었어.”
김승일이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호텔에서 전화가 걸려오고 30분도 되지 않아 이번에는 한국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KAL기를 탔었지요? 바그다드에서 KAL기를 타고 아부다비에서 내리지 않았습니까?”
한국인이 물었으나 김승일은 한국말을 모르는 체했다. 한국인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몇 마디 질문을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이놈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아.”
김승일이 전화를 끊고 방안을 서성거리면서 말했다. 한국인이 전화를 걸어왔다면 무엇인가 눈치를 챈 것이 분명했다. 김현희는 김승일의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내일이면 우리는 로마에 가 있을 테니까.”
김승일이 스스로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전화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일본대사관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은 여권번호와 이름에 대해서 물었다. 김승일은 긴장한 목소리로 여권 번호와 이름을 알려주었다.
“위조 여권이 발각된 게 아니에요?”
김현희는 더욱 불안했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여권을 일본에 조회한다고 해도 2, 3일이 걸려.”
김승일은 그렇게 말했으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다시 전화가 걸려와 한국인이 방으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김승일은 거절했으나 한국인은 외교관이라면서 중요한 일 때문에 찾아오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국 외교관이 온다고 하니까 침대에서 자는 척하고 있어.”
김승일이 불안에 떨고 있는 김현희에게 말했다. 잠시 후 한국 외교관이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김승일은 문을 반쯤만 열고 일본인인 체하면서 한국 외교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위장했다. 한국 외교관은 일본 말에 영어까지 섞어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일본 말이 서툴렀고 김승일은 영어에 서툴렀다. 한국 외교관은 KAL858편이 추락했기 때문에 그 비행기에 탄 동양인들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김현희는 김승일의 지시대로 등을 돌리고 누워서 자는 척했다. 한국 외교관이 침대에 누워 있는 김현희를 살피려고 했으나 김승일이 막았다.
“KAL기가 분명히 폭발한 것 같다. 우리 임무는 성공했다. 그게 문제가 된 것 같아. 걱정 말고 잠을 자. 내일 떠나면 되니까.”
한국 외교관이 돌아가자 김승일이 말했다.
“내일 비행기를 탈 수 있겠어요? 우리가 체포되는 게 아니에요?”
김현희는 걱정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국 외교관이 호텔까지 찾아왔다면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가 우리를 체포해?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
“우리의 정체가 발각된 것 같아요.”
김현희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승일은 한국 경찰이 바레인까지 올 수 없고 바레인 경찰은 KAL기 추락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공작원들을 체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대사관 직원이 아무리 설쳐도 사법권이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김현희는 잠이 오지 않았다. 김승일의 말을 믿고 싶었으나 한국 경찰이 그들을 체포하러 오는 모습이 자꾸 연상되었다. KAL기가 추락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바그다드에서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KAL기에 탔었다. KAL기가 추락했다면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12월 1일 아침 7시경에 일어나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김승일이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 담뱃갑 하나를 김현희의 핸드백에 넣어 주었다. 김현희는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 담뱃갑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그것은 김승일도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비상시에 앰플을 깨물어서 자살을 하라는 뜻이었다. 초대소에서 교육을 받을 때 공작원들이 활약을 하는 영화를 수없이 보았었다. 영화의 내용은 임무를 마친 공작원이 위기에 몰리면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장렬하게 자살하는 것이었다.
‘그래. 발각되면 자살할 거야.’
김현희는 비장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