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개봉 아닌 넷플릭스 납품 위주 재편 우려…설경구·송강호 등 대배우마저 드라마 노크
이 자리에서 서랜도스 대표는 “앞으로 4년 동안 한국 드라마, 영화, 리얼리티쇼 창작을 도울 것이다. 이 금액은 지난 2016년부터 2022년까지 투자한 총금액의 2배에 달하는 액수”라며 “한국 창작업계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한국이 멋진 이야기를 계속 들려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대통령께서 한국의 엔터사업과 한류에 대해 애정을 갖고 강력한 지지를 보내준 것도 한몫했다”고 투자 배경을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에서 “이번 투자는 대한민국 콘텐츠 사업과 창작자, 그리고 넷플릭스 모두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라며 “넷플릭스의 파격적인 투자 결정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넷플릭스가 무려 25억 달러(약 3조 3000억 원) 투자하면 한국 연예계에 상당한 활력이 더해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심각한 위기에 놓인 영화계에선 자칫 한국 영화가 넷플릭스에 종속될 수도 있다는 우려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최근 한국 영화계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내몰려 있다. 2023년 개봉 한국 영화 가운데 관객을 100만 명 이상 동원한 작품은 현빈·황정민 주연의 ‘교섭’이 유일하다. 그나마도 172만 1111명 동원에 그쳤다. 설 연휴 대목에 개봉한 기대작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기대 이하의 성적표다. 게다가 2023년 들어 손익분기점을 넘긴 한국 영화는 아예 한 편도 없다. 다시 말해 올해 개봉해 극장에서 돈을 번 한국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는 의미다.
영화계에선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직까지는 개봉 대기 중인 대작 영화들이 여러 편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봉을 못한 대작 ‘창고 영화’도 여러 편 있다. 극장가가 너무 불황이라 개봉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 영화 제작은 정상적으로 이뤄져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영화 제작 자체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3월 24일에 열린 한국영화감독조합 주최 ‘디렉터스 컷 어워즈’ 토크 프로그램에 참석한 윤제균 감독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가 두렵다”며 “시장은 줄고 관객은 오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영화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이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윤 감독은 2024년 하반기부터는 한 달에 한국 영화가 극장에 몇 개나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정상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못해 영화 제작 현장이 사실상 멈춰서 버린 까닭이다.
이런 현실에서 넷플릭스의 25억 달러 투자가 발표됐다. 제작 현장에는 활력소가 될 수 있는 발표지만 앞으로 한국 영화가 자체적인 극장 개봉이 아닌 넷플릭스 납품 위주로 재편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가 있을지라도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제작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넷플릭스가 투자 의지를 보이면 제작사들도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넷플릭스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한 중소 영화사 대표는 “넷플릭스는 제작비에 일정 부분의 수익까지 미리 보장돼 흥행 실패 부담이 없지만 엄청나게 흥행에 성공할지라도 추가 이익이 없다”면서 “영화 제작사들은 여러 편 실패해도 한 편 크게 성공하면 그 동안의 실패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도전을 하게 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인데 한국 영화의 기반이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에 귀속되면 점차 좋은 작품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하나둘 영화계를 떠나고 있다. 설경구는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출연을 확정지었고 송강호도 10부작 시리즈 ‘삼식이 삼촌’에 출연한다. 물론 예전에도 드라마 시장이 좋을 때 A급 배우들이 영화 대신 드라마에 출연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영화계에선 “설경구와 송강호까지 간다면 이젠 다 갔다는 의미”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설경구는 1995년 ‘사춘기’ 이후 28년 만의 드라마 출연이고 송강호는 첫 드라마 출연이다. 설경구의 기존 드라마 출연작이 1994년 ‘큰 언니’와 1995년 ‘사춘기’ 단 두 편으로 무명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첫 드라마 출연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런 한국 영화의 위기가 K드라마 활성화로 이어진다면 그나마 선순환일 수 있지만 넷플릭스의 대대적인 투자로 K드라마 시장까지 흔들릴 수 있다. 과거에는 방송국마다 월화드라마와 수목드라마가 미니시리즈로 편성됐지만 지금은 금토 내지는 토일드라마 중심으로 재편됐다. 방송사마다 매주 두 편가량의 미니시리즈를 내놓던 방식이 매주 한 편 정도로 축소됐다는 의미다. 종합편성채널과 케이블 채널 상황도 어렵긴 매한가지다. 최근에는 케이블 채널 tvN도 수목드라마 편성을 잠정 중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넷플릭스의 대규모 투자로 K드라마 시장의 중심축이 방송사에서 OTT로 완전히 재편될 수 있다. 중견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이미 연예기획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다. 이미 A급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드라마라 분량이 길 뿐 촬영 현장은 기존 영화 현장과 유사하다. 게다가 잘 되면 국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급도 단 번에 월드스타가 될 수 있다”고 요즘 분위기를 설명했다.
영화계에서는 한국 영화 제작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넷플릭스의 파격적인 투자 결정이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서 일궈낸 커다란 성과임이 분명하지만 정부의 한국 영화 산업 지원이 동시에 이뤄지지 못하면 더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영화진흥위원회가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협의체’ 구성 준비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움직임에 돌입하긴 했다. 그렇지만 영화관계자들은 정부 차원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앞서의 영화사 대표는 “한국 영화가 굳건해야 넷플릭스가 투자한 한국 영화가 보조를 맞추며 영화 산업 전반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데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선 자칫 한국 영화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면서 “분명 한국 영화계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고 있지만 자칫 한국 영화의 발전이 아닌 넷플릭스의 발전에만 기여하는 방향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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