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규 회장은 1968년 일진금속공업사(현 일진전기)를 설립했다. 허 회장은 이어 동복강선,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 PCB(인쇄회로기판)용 일렉포일 등의 사업에 연이어 진출하면서 사세를 키웠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지난해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진그룹의 자산 규모는 5조 2170억 원으로 재계서열 73위에 해당했다.
당초 재계에서는 일진그룹이 허진규 회장의 장남 허정석 일진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허재명 전 일진머티리얼즈 사장 등 두 사람을 중심으로 계열분리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분 정리도 어느 정도 끝난 상황이었다. 지난해 말 기준 허정석 부회장은 일진홀딩스 지분 29.12%를, 허재명 전 사장은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53.30%를 각각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허재명 전 사장은 지난 3월 보유 중인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전량을 롯데그룹에 2조 7000억 원을 받고 매각했다. 허 전 사장은 일진머티리얼즈 사내이사에서도 퇴임했다. 허 전 사장이 일진머티리얼즈를 매각함에 따라 일진그룹의 총 자산 규모도 2조 원대로 줄어들어 공시대상 기업집단에서 제외됐다.
재계에서는 허재명 전 사장의 향후 행보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오갔다. 일각에서는 허 전 사장이 과거 추진했다가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패션 사업에 재도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하지만 일진그룹과 허 전 사장 모두 일진머티리얼즈 매각 사유와 향후 행보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요신문 취재 결과 허재명 전 사장은 지난 2월 14일 ‘아이에이치컴퍼니’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이에이치컴퍼니의 사업목적은 △증권 및 유가증권의 투자 및 매매업 △채권의 투자 및 매매업 △부동산의 매매, 개발 및 공급업 △부동산 임대업 △부동산 거래 및 개발에 대한 컨설팅업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및 구조화 금융업 △NPL(부실채권) 자산의 매매 및 자산유동화업 등이다.
아이에이치컴퍼니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은 지난 4월 26일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아이에이치컴퍼니 사무실을 방문했지만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 인근 사무실 관계자는 “(아이에이치컴퍼니는) 한 달 정도 전에 입주했다”면서도 “상주하는 직원은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허재명 전 사장은 일진머티리얼즈 매각 대금으로 수조 원의 현금을 얻었기에 자본에 대한 걱정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최근 증권 투자업과 부동산업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점은 사업 본격화의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이형석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부동산 PF 부실 위험이 상존하는 가운데 국내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심화되면 부동산 경기의 회복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실물경기의 위축과 금융 불안정성이 심화될 경우 경착륙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분석했다. 증시도 조정 우려가 높다. 양해정 DS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식 시장은) 시장 조정으로 인한 우려가 높아졌고, 밸류에이션(가치평가) 수준도 높아져 있어 조정의 빌미도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허재명 전 사장이 일진그룹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낮게 본다. 허 전 사장은 2006년부터 일진머티리얼즈 경영에 집중했고, 그룹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형인 허정석 부회장과 교류가 많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오히려 허 전 사장이 가족들과 거리를 뒀다는 뒷말도 나온다. 재계에서는 허 전 사장이 일진머티리얼즈를 매각할 당시 허진규 회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허재명 전 사장이 처남인 박철완 전 금호석유화학 상무를 지원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박 전 상무는 2021년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의 경영권 다툼에서 패한 후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허 전 사장이 박 전 상무를 지원하면 금호석유화학 경영권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금호석유화학의 시가총액이 약 4조 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2조 원의 현금으로 금호석유화학 지분 약 50%를 확보할 수 있다. 박찬구 회장과 특수관계자가 보유한 금호석유화학 지분은 26.05%고, 여기서 박철완 전 상무의 지분(8.87%)을 제외하면 17.18%다. 허재명 전 사장이 마음만 먹으면 금호석유화학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당겨질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러나 박철완 전 상무 측 관계자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관계 끝? 일진그룹에 발 걸친 허재명 전 사장
허재명 전 일진머티리얼즈 사장은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전량을 매각했지만 일진그룹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롯데그룹에 매각되기 직전 일진제강 지분 10.35%를 허 전 사장에게 매각했다. 일진제강의 현재 주주구성은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68.18% △허재명 전 사장 17.74% △일진C&S 6.89% △김향식 씨(허진규 회장 아내) 4.45%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허재명 전 사장에게 일진디스플레이 지분 14.64%도 매각했다. 일진디스플레이 주주는 △허진규 회장 24.63% △허재명 전 사장 14.64% △일진반도체 3.09% 등으로 구성돼 있다. 허진규 회장 의중에 따라 일진제강과 일진디스플레이의 경영권이 허재명 전 사장에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허진규 회장은 허재명 전 사장보다는 장녀 허세경 일진반도체 대표를 밀어주는 분위기다. 허세경 대표는 일진반도체와 일진C&S 최대주주다. 따라서 일진제강과 일진디스플레이의 실질적인 3대주주다. 허 회장은 지난 1월 일진제강 지분 6.89%를 일진C&S에 증여한 바 있다.
현재 지분율을 고려했을 때, 향후 허세경 대표가 일진제강과 일진디스플레이의 경영권을 얻더라도 허재명 전 사장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일요신문은 이와 관련한 입장을 듣기 위해 일진그룹에 연락을 취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