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뉴스 |
▲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이 미래전략실장에 임명되면서 명실상부한 그룹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작은 사진은 지난 3월 스페인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에 참석한 최 실장. 사진공동취재단 |
#‘1등 제조기’ 실무형 2인자
19년 전인 1993년 6월 7일. 이건희 삼성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꾸라”고 말했다. 삼성의 혁신을 강조하고 미래 방향을 제시한 이 말은 이건희 회장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 ‘신경영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로부터 꼭 19년이 흐른 지난 7일. 이건희 회장은 또 한 번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을 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 임명한 것. 19년 전의 선포와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최 실장의 임명에도 이건희 회장의 위기의식과 혁신 의지가 내포돼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최 실장 임명은 이 회장이 유럽 출장길에서 돌아와 유럽 경제 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역설한 직후 이뤄졌다. 그룹 2인자를 정기인사도 아닌 때 전격적으로 교체한다는 것은 이건희 회장이 그만큼 절박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195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최지성 실장은 춘천에서 고등학교(춘천고) 1학년까지 다녔다. 이후 서울고로 전학, 서울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1977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지금까지 ‘삼성맨’으로 근무하고 있다.
입사 후 35년 만에 그룹 2인자 자리에 오른 최 실장은 삼성 내에서 글로벌 삼성을 이끈 일등공신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도체, TV, 모니터, 휴대전화 등 현재 삼성이 글로벌 시장점유율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거나 1위를 노리는 디지털부문은 모두 최지성 실장의 손을 거쳤다. 최 실장은 1990년대 삼성 반도체를 세계 1위로 올려놓았으며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디스플레이사업부를 이끌며 삼성을 이 부문 세계 1위로 만들었다.
2006년 보르도TV를 앞세운 삼성이 소니를 제치고 TV부문 1위에 등극할 당시 선장이 바로 최 실장이다. 당시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겸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사장이었던 최 실장이 TV부문 1위 달성을 기념해 임직원들 앞에서 보르도 와인을 잔 가득 따라 ‘원샷’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2007년 8월 무선사업부 사장을 맡으며 삼성 휴대전화를 세계 최고 반열에 올려놓았다.
문과(무역학과) 출신이어서 입사도 삼성물산으로 한 최 실장이 반도체와 디지털 분야를 이끌기는 어려웠을 터. 더욱이 최 실장은 주로 반도체·디지털 해외 수출과 판매사업을 담당했다. 문과 출신의 한계와 반도체·디지털에 대한 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무려 1000쪽이 넘는 반도체 관련 서적을 암기했으며 반도체와 관련된 현안과 이슈, 보고서 등을 줄줄 외운 후 해외 바이어들을 상대하며 물건을 팔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1985년 1월 반도체사업부를 맡으며 유럽으로 발령났을 때 일이다.
삼성물산을 거쳐 삼성반도체 기흥관리팀장, 삼성전자 반도체판매사업부장 상무,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부사장,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부회장을 역임한 최 실장은 입사 직후 몇 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삼성전자에 몸담아왔다.
최 실장은 세계 각지를 누비며 직접 디지털 기기들을 팔러 다닌다고 해서 ‘디지털 보부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반도체·디지털 분야 영업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야전사령관’, 어떤 일이든 철두철미한 성격 때문에 ‘독일병정’이라는 별명도 따른다.
최 실장은 비서실과 인연도 깊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직후인 1993년 10월부터 약 1년 2개월간 회장비서실 전략1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신경영 선언 이후 대대적인 혁신바람이 불 때 비서실 전략팀장에 발탁됐다는 것은 최 실장의 능력을 일찍부터 알아봤다는 얘기다.
2010년 12월 이재용 사장이 삼성전자 사장으로 승진했을 당시 최지성 실장은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를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최지성 사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해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이 ‘젊은 인재론’을 강조하던 때였고 삼성 사장단의 평균 연령이 낮아진 데다 오너가 사장으로 승진한 뒤 부회장 승진은 사실상 퇴진 수순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최지성 부회장은 대표이사라는 직함을 유지한 채 해외 영업 현장을 둘러보며 바쁜 행보를 보였다. 지난 5월에는 애플 최고경영자 팀 쿡을 만나 특허 협상을 벌이는 등 여전히 삼성전자의 대표로서 활동해왔다.
▲ 2010년 삼성전자 반도체 16라인 기공식 첫 삽을 뜨는 모습. 반도체·TV·휴대폰 등 삼성의 글로벌 작품은 최지성 실장 손을 거쳐 탄생됐다. |
‘영업기획통’으로 불리는 최지성 실장이 부임함으로써 삼성 미래전략실의 역할이 확 바뀔 것이라는 예상이 적지 않다.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로 이어져온 삼성 미래전략실은 그 태동이 비서실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의 비서 업무를 수행하거나 그룹의 전반적인 업무를 조정해왔다. 실장에 ‘가신’으로 분류됐던 소병해·이수빈·이학수 전 실장 등이 기용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최 실장은 가신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이재용 사장의 측근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삼성전자의 한 부장급 인사는 “삼성 사람이라면 최 실장이 이재용 사장의 직계라는 것은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실장의 부임 배경 중 하나로 ‘삼성 후계구도를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 실장을 그룹 2인자 자리인 미래전략실장에 앉힌 데는 이건희 회장이 현재 삼성에 필요한 인물은 ‘가신’보다 삼성을 계속 글로벌 1등 기업으로 이끌어갈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미래전략실이 비서실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면 이제는 삼성의 사업 전략을 기획하고 삼성의 미래를 제시하는, 그야말로 ‘미래전략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탈바꿈시키겠다는 이건희 회장의 의중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회장이 더는 가신그룹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재계 한 고위 인사는 “최 실장을 임명한 것은 지나치게 가신그룹을 믿고 그들에게 내부 사정을 맡기는 것에서 벗어나 미래를 대비하는 데 치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그룹 내부와 오너 일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신 출신의 관리형보다 최지성 실장 같은 실무형 야전사령관을 정점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어 이 인사는 “가신그룹을 믿지 못하게 됐다는 것도 한 이유”라고 말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지난 2010년 이건희 회장이 ‘부패척결’을 외치던 때 이후 가신에 대한 이 회장의 실망감이 대단히 컸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건희 회장은 최지성 실장 발령에 앞서 지난 4일 삼성 중국법인장을 박재순 부사장으로 교체하는 등 소폭 인사를 단행했다. 이 같은 인사 스타일에 대해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차에서나 볼 수 있는 깜짝 인사가 빈번해지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대체로 연말 정기인사 때나 볼 수 있었던 삼성그룹 인사가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유럽을 둘러본 이건희 회장의 위기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표면적으로는 신경영 선언 19주년을 내세우지만 우리 정서상 20주년이라면 모를까, 19주년은 특별한 이유를 부여하기 힘들다. 유럽 경제 위기를 직접 눈으로 본 이건희 회장이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5대 신수종 사업’ 미래는
이 회장이 중국사업의 지지부진함을 못마땅해 했다는 것도 갑작스러운 인사를 단행한 배경이라는 얘기가 삼성전자 내부에서 돌고 있다. 삼성전자 내 한 인사는 “이번 인사의 관심이 대부분 최 실장에게 쏠려 있지만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중국사업 관련 인사”라며 “회사 내에서는 중국사업 핵심 담당자들이 모두 교체됐거나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털어놨다.
삼성은 중국 시장에서 TV 사업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장점유율마저 하락하고 있다. TV부문에서는 중국 업체들, 샤프와 소니 등에도 밀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마트폰 부문 1위’라는 명성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TV부문에 관한 한 미주지역과 유럽지역에서도 판매율이 떨어지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로 어지러운 유럽지역에서 TV 판매량은 지난해 전년 대비 11.1% 하락한 것에 이어 올 1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20.7% 감소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앞서의 삼성전자 부장급 인사는 “TV부문에서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며 “내부에서는 휴대전화 덕분에 먹고 산다는 말이 파다하다”고 전했다.
중국사업의 부진, 유럽 경제위기로 인한 TV 판매량 하락 등이 최지성 실장의 발탁 배경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르도TV로 삼성TV를 세계 1등에 올려놓은 최 실장이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자리에서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해달라는 의미인 셈이다.
최 실장 부임을 계기로 삼성이 5대 신수종사업을 본격적으로 강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삼성은 지난 2010년 5월, 5대 신수종사업(태양전지, 바이오, 자동차용 전지, LED, 의료기기·제약)에 10년간 23조 원가량을 투자, 미래 먹을거리와 사업다각화를 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이들 사업에서 눈에 띌 만한 진척이 보이지 않는다. 재계에서는 김순택 전 실장의 사실상 경질 이유 중 하나로 5대 신수종사업이 지지부진한 것을 들고 있기도 하다. 이건희 회장이 ‘야전사령관’ 최지성 실장의 추진력과 영업기획이 5대 신수종사업에서도 발휘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리스크가 너무 커 가능성은 작지만 ‘신수종사업 전면 재검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신수종사업이 대부분 악화한 글로벌 경제 환경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삼성의 사업다각화를 새로 모색해 새판을 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새로운 실장의 부임에 따라 대대적인 후속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언론의 주목을 피해 최 실장의 업무파악을 끝낸 후 단행될 것”이라며 “그 시기는 연말 정기인사 때로 맞추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삼성이지만 이래저래 따져보니 쌓여있는 현안이 만만치 않다. 새 컨트롤타워 최지성 미래전략실장이 ‘1등 제조기’의 명성에 걸맞은 성과를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 지난 14일 이건희 회장이 페루 헬기 추락사고로 희생된 임직원의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왼쪽은 이재용 사장, 오른쪽은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사진제공=삼성전자 |
‘절대반지’ 이양 시기는…
최지성 실장의 미래전략실장 임명으로 삼성의 후계체제 준비가 본격화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최 실장이 이재용 사장의 직계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세트부문장 인사는 따로 없다”는 삼성그룹 측 발표에도 재계 일각에서는 최지성 부회장의 미래전략실장 임명으로 공석이 된 삼성전자 세트부문장(정보통신·TV)을 이재용 사장이 맡을지 모른다는 예측도 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이 사장이 세트부문장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사장이 오너이자 후계자라는 점이다. 만약 오너이자 후계자인 이 사장이 어느 한 부문을 맡는다면 그쪽으로 힘과 무게중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런 판에서는 다른 부문 수장들이 추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될 우려가 짙다. 위기를 돌파해야 할 마당에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은 안 될 노릇이다. 유럽 위기를 둘러보고 귀국한 후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 이건희 회장이 그런 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와 관련, 당분간 이건희 회장의 친정체제가 계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는다. 가신을 2인자로 앉히지 않은 것은 위기가 잦아들기까지 당분간 이 회장이 직접 현안을 챙기겠다는 의지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후계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것처럼 예상됐지만 밖으로는 유럽 재정 위기, 안으로는 형제간 상속재산 분쟁이 얽히면서 이 회장이 이재용 사장에게 권력을 쉽게 넘기기 힘들어졌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