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종차별 발언 논란을 빚은 존 테리. 왼쪽은 그를 잉글랜드 대표팀에 발탁한 로이 호지슨 감독. AP/연합 |
▲ 솔 캠벨. |
“존 테리를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발탁한 게 말이나 되는가. 그와 한 팀에 있다는 것만으로 선수들 사기는 저하될 것이다.” 지난 6월 13일 낮, 런던 북부에서 만난 흑인 남성 마크(27)의 말이다.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기도 한 존 테리는 지난해 10월 퀸스파크레인저스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 도중 흑인 수비수 앤턴 퍼디낸드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켰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흑인 동료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있는 테리의 사진을 실기도 했다.
영국 총리까지 올해 초 공식 석상에서 “영국에서 인종주의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비판했음에도 테리를 대표팀으로 부른 건 로이 호지슨 감독이다. 호지슨 감독은 “테리는 우수한 선수다. 유로 2012에 꼭 필요하다”고 선발의 이유를 밝혔지만, 앤턴 퍼디낸드의 친형이자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해 성토한 리오 퍼디낸드에 대해선 테리와의 불협화음을 일으킬 가능성 때문에 탈락시켰다고 밝혀 논란을 재점화했다. 6월 11일 프랑스와의 조별 예선에서 잉글랜드는 졸전 끝에 무승부를 거두어 ‘존재 자체만으로 대표팀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테리의 경기 출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기도 했다.
무엇보다 문제는 주장의 상징성이다. 보수적 풍토의 영국에서 대표팀 주장은 실력 외에도 인성적으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존 테리는 인종차별 발언으로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직을 박탈당했으나, 소속팀 첼시에서는 여전히 주장 완장을 차고 있다. 런던 북부의 한 술집에서 만난 조나단 렉(41)은 “(지금 대표팀에서 뛰는) 테리를 보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행여 대표팀 주장이라는 사람은 흑인을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무섭다”며 “(호지슨 감독은) 경기에서 테리를 제외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흑인 남성 조지 배시(54)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사그라지고 있긴 하지만, 축구에서만 유독 인종주의가 남아 있다고 배시는 말했다. “사실 유로 2012를 보기 불편하다. 러시아와 체코와의 경기를 봤는가? 러시아 관중들이 체코의 유일한 흑인 선수인 테오도르 게브르 셀라시에를 집중적으로 야유하는 걸 보고 섬뜩했다.”
자신을 축구광이라고 밝힌 존 힐(50)은 “사실 백인 선수를 보면 더욱 친근한 마음이 든다”며 “나 어릴 때만 해도 흑인 선수를 보기 힘들었다. 시대가 변하긴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국 흑인 선수가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건 지난 1978년 체코 월드컵인데 그전까지 사회 분위기상 흑인 선수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흑인 선수 4명이 잉글랜드 대표팀 주전으로 출전하자 대중지 <더선> 등은 놀라운 사건인 양 보도했다.
축구 역사를 살펴보면, 인종주의를 허무는 가장 쉬운 길은 불세출의 선수가 등장하는 것이다. 혼혈아인 조지 베스트는 1960~7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무수한 골을 넣으며 영국 밴드 비틀스를 능가하는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9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 우승을 차지하자, 극우 정치인 르펜은 “저게 무슨 프랑스 대표냐”며 혀를 찼다. 순혈 프랑스인이 아닌 지네딘 지단 같은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 2세들이 대표팀에서 주축인 게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단이 2006년 월드컵까지 프랑스 대표팀을 이끈 데다 스페인 명문팀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맹활약한 덕분에 프랑스 내에서 대표팀 선발에 관해 이민자 출신의 발탁은 꾸준히 힘을 얻고 있다
▲ 지단과 에우제비오. |
독일 심리학자 호르스트에버하르트 리히터는 “스포츠의 승리를 함께 체험하는 일은 삶의 갈등이 주는 환멸을 잠시나마 보상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19세기 축구선수 구달은 “축구만큼 악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경기는 없다”고 말했다. 유로존 재정 위기로 유럽 전체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유로 2012는 유럽인의 고단한 삶을 위로할까 아니면 뿌리 깊은 인종주의를 심화할까 이 대회를 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이승환 영국통신원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