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인 나는 가해자인 모자를 죽은 아이의 가난한 월세방으로 여러 번 보냈다. 이기주의를 벗어나 한번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보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이런 사건의 경우 학교 측이 지나칠 정도로 자기방어가 심한 경우가 많았다. 담임을 비롯해서 교장까지 지나칠 정도로 조심하고 소극적이었다. 자칫하면 법적 책임이 자신에게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며칠 전 햄버거게임을 하다가 죽은 중학생의 엄마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가위바위보를 하고 그 승부에 따라 밑에서부터 햄버거같이 아이들이 포개어 올라가는 놀이라고 했다. 제일 밑에 깔린 아이는 압사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렇게 아이가 죽었다. 신음하고 있는 아이를 선생은 바로 구조하지 않고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가 119에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자 그때서야 시키는 대로 했다. 응급실 의사가 왜 그렇게 됐는지 물었다. 수술 전 문진(問診)은 중요하다. 학교 측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뇌에서 나오는 다발성 출혈을 의사는 잡을 수가 없었고 그렇게 아이는 죽었다. 학교는 철저히 함구했다. 햄버거게임을 한 아이들의 입도 철저히 단속했다.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이나 검찰의 시각에서 그건 큰 사건이 아니었다. 살인의 고의가 없으니까 살인죄도 아니다. 형식적인 서류작성으로 수사는 끝났다. 수사과정도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 도대체 왜 죽었는지 엄마는 미칠 지경이었다. 엄마의 어깨를 주물러주던 자상한 아들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의 분노는 하얗게 서리가 내린 한으로 변하고 있었다.
학교 폭력에 즉각 경찰이 투입되고 법원이 관여한다고 해도 학교의 의무가 중요하다. 필자 역시 중학시절 싸워본 적이 있고 또 칼에 맞아보기도 했다. 두고두고 남는 것은 학교 측의 위선에 대한 섭섭함과 한이었다. 교장은 어떻게든지 사회에 노출되지 않게 하려는데 급급했다. 선생들은 그런 교장의 지시에 양같이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 칼에 맞은 피해자인 데도 교육이란 명분 속에서 사건은 실종됐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한 선생이 조용히 나를 불러 고백했었다. 부잣집 아들이던 가해학생의 부모로부터 모든 교사가 고급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대접받았다고. 그 자리에서 고급 양복과 두둑한 보너스를 받았다고 했다. 양측 담임과 교장은 훨씬 많은 웃돈을 받았다고 했다. 고백한 교사는 선생답지 못해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첫 번째 칼보다 학교의 집단부정인 두 번째 칼날에 영혼마저 반쯤 잘려나갔었다. 바닷가 조용한 마을 보건소에서 의사가 되기를 꿈꾸던 나의 희망이 법대로 바뀌게 된 계기였다. 영혼의 상처는 오래갔다. 학교폭력 앞에서 교사들이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 터무니없는 트집과 소송을 일삼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바른 일을 하고 고통을 당하는 게 교사의 의무다.
변호사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