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마유미> 스틸 사진. |
김승일이 김현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들은 출국 검열대 앞으로 줄을 서서 걸어갔다. 공항에는 흰옷을 입고 히잡을 쓴 아랍인들이 많았다. 검열대에 여권을 제시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검열대의 직원이 여권과 김승일을 번갈아 살폈다.
“기다리시오.”
검색대 직원이 여권을 압수하고 차갑게 말했다. 김승일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김현희도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출국검열대 주위에는 공항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치야 신이치 씨….”
이윽고 일본대사관 남자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김승일과 김현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예.”
김승일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의 여권은 위장여권입니다. 이 여권으로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대사관에 가서 조사를 받은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본 대사관 직원의 말은 청천벽력 같았다. 여권을 정밀하게 위조했기 때문에 그동안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착오일 것입니다. 여권을 돌려주십시오.”
김승일이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
“착오가 아닙니다. 이미 하치야 신이치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시오.”
일본 대사관 직원은 냉랭하게 말하고 여권을 돌려주지 않았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으나 공항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달아날 곳이 전혀 없었다. 김현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김승일과 김현희는 의자에 앉아서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일본에 보내도 우리는 이래저래 고생하다가 죽을 거야. 잘못하면 고문을 당하니까 여기서 약을 먹어야 해.”
김승일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김현희는 천길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는 듯한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이때 바레인 경찰이 와서 김현희와 김승일을 데리고 각각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김현희는 그들에게 반항을 할 수도 없었다. 바레인 경찰은 김현희의 몸수색을 철저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서 수상한 물건이 나올 까닭이 없었다. 몸수색이 끝나자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김승일과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침착하라우.”
김승일이 담배를 피우며, 김현희에게도 담배를 한 대 주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데 경찰이 김현희의 핸드백을 압수하겠다고 말했다. 김현희는 담뱃갑을 꺼내 들고 가방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여자 경찰관이 담배검사를 잊은 것이 생각났는지 담배를 달라고 요구했다. 김현희가 김승일을 쳐다보자 주지 말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김현희는 결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빼앗기면 자살을 할 수 없게 된다. 김현희는 여자 경찰관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 필터 부분을 깨물었다. 여자 경찰관이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곧 정신을 잃었다.
김현희가 자술서에 쓴 내용이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자술서를 바탕으로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김현희는 체념했는지 묻는 대로 차분하게 진술했다. 그러나 바레인 공항에서 앰플을 깨무는 장면을 진술할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진짜로 앰플을 깨물었어? 혹시 안 깨물고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야?”
수사관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깨물었다잖아요.”
김현희는 그 부분에서 기이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바레인 경찰의 보고서에는 경찰이 김현희의 담배에만 정신을 쏟아 그것을 빼앗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김승일은 제대로 앰플을 깨물어 죽을 수 있었으나 김현희는 경찰이 앰플을 깨무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확실하게 깨물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가족에 대해서 얘기해 봐.”
수사관들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고향이 함경남도 풍산인 아버지 김원석(당시 앙골라주재 북한무역대표부 수산대표)과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임명식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후에 남동생 범수가 87년 5월에 피부암으로 죽었는데 이 사실을 말하기 싫어 남동생이 한 명이라고 거짓말 했다고 말했다)로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에서 태어났어요. 동생은 김현옥과 김현수가 있고 갓난아기 시절 아버지가 쿠바대사관으로 가게 되어 67년까지 쿠바에서 생활했습니다.”
김현희는 아버지가 함경도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함경도 출신을 가장 출신 성분이 좋다고 하는데 그것은 해방 이전에 남한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곳이고 또 지주 출신들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개성 출신이라는 것은 북한에서도 말하길 꺼리는데 그것은 해방 전까지 개성이 남한 땅이어서 지주들이나 반동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많고 대부분 한두 사람은 남한으로 내려간 가족들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현희는 개성에서 내려온 어머니의 친척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녀의 친척들은 대부분 남한에서 성공하여 잘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북한에서 어머니로부터 한번도 남한에 친척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쿠바에서 살았던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했다. 북한에서 외국에 나가 산다는 것은 특권이었고 무엇보다 먹을 것이 풍족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좋아했다. 쿠바에 있다가 북한으로 들어간 후에는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해 쿠바에서의 생활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김현희는 쿠바에서 지낼 때 지나가는 아이스크림장수를 ‘엘 라데로’라고 부르던 것과 바다 건너편에는 미국 놈들이 살고 있다고 하여 무서워 울었던 일 등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현희는 67년 북한으로 돌아가서 평양 하신유치원, 하신인민학교 4년, 중신중학교 5년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생물과에 1년을 다니다가 외국어를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평양 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대학 2학년인 80년 3월 갑작스런 중앙당 간부의 면접을 거쳐 노동당 조사부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지금까지 공작원으로 생활했다고 진술했다.
▲ 1990년 7월, KAL기 폭파범으로 사형이 확정됐다 특별사면된 김현희가 외재종조부(6촌 외할아버지) 임관호 씨와 극적으로 상봉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제공=우먼센스 |
“87년 10월 말경 마카오에서 불법 체류 중국인에게 마카오 영주권을 준다는 정보에 따라 함께 공작원 훈련을 받으면서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던 김숙희와 중국 광저우에 머물던 중 긴급 복귀하라는 명령에 따라 평양으로 급히 와보니 전에 함께 해외여행 실습을 한 적이 있던 김승일(하치야 신이치)과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 대외정보조사부 이아무개 부장으로부터 88서울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KAL기 폭파에 대해서 김현희가 진술한 말이었다.
“이 아무개 부장이 한 말 그대로 해봐.”
수사관이 김현희에게 말했다.
“말한 그대로입니다.”
김현희가 대답했다.
“제끼라는 게 무슨 뜻이야?”
“처음엔 나도 어떻게 제끼라는 것인지 의아해 했지만 곧 그것이 폭파하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시킨 거지?”
“부장이 김정일 동지의 친필지령이라고 꼭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KAL기 폭파는 한국이 안전하지 않다, KAL기는 위험하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벌인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해 KAL기를 제끼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후 김승일은 계속 노정연구를 했습니다. 가끔 중동지역은 전쟁 중이어서 폭발물을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위험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등 이번 노정에는 문제가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김승일은 노련한 공작원이었다. 노정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지도자 김정일의 지시였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것 같았다.
“비행기를 폭파할 계획이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그런 여유가 있었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진 촬영을 한 것입니다.”
“쇼핑도 했잖아?”
“쇼핑을 하기도 했지만 늘 누가 우리를 의심하지는 않을까, 주변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은 없는지 늘 조마조마하였습니다. 바그다드공항의 검색대에서 라디오의 배터리를 비행기에 못가지고 간다고 수거해 쓰레기통에 버려 당황하기도 했지만 얼른 주워 라디오에 넣어 틀어 보이면서도 이상이 없는 배터리 아니냐고 항의하여 다시 배터리를 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계획대로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라디오에 시한장치를 한 후 KAL기에 탑승하여 선반에 올려놓고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림으로써 일단 임무는 완수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KAL기에서 내릴 때도 누가 우리더러 짐을 놓고 내린다고 말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
“비행기가 폭파되면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나?”
“나는 떨리는 마음에 무조건 임무를 완수하는 데만 온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조국통일을 위해선 그런 희생쯤은 감수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서로 얼마 만에 한국에 간다는 등 조선말로 얘기하면서 즐거운 모습을 하는 것을 보고 일순간 조금 마음에 안됐기도 했습니다.”
김현희가 말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