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제도로 1970년대 활성화 뒤 사기도 급증…민간 임대 사업자제도도 피해 양산 한몫
우리나라 전세제도는 고려시대의 ‘전당’을 시초로, 조선시대 ‘가사전당’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전당은 물건이나 논밭 등을 담보로 돈이나 재물을 빌리는 제도였다. '고려시대 전당제도 연구' 논문(윤성재)에 따르면 고려시대 전당은 원칙적으로 기한 내에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 하면 담보물의 소유권은 채권자에게 영구히 귀속된다는 특약을 체결했다. 당시 개인 간 소액 전당의 담보물은 옷이나 머리장식 등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자율은 소액전당 월 5% 고액 전당은 월 1%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주택을 대상으로 하는 가사전당으로 발전했다. 조선시대 말에는 임차인이 가옥 가격의 50~80% 금액을 가옥주에게 위탁할 경우 별도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고 계약했다. 계약 종료 시점에 해당 금액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 관습조사보고서에는 ‘전세란 가옥임차 시 차주로부터 일정 금액을 가옥 소유주에게 기탁해 별도 차임을 지불하지 않고 가옥반환 시 그 금액을 반환하는 제도’로 등재돼 있다.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전세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때는 1970년대 이후라고 보고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찾아 농촌 인구들이 대도시로 몰리면서 주택수요가 급증했다. 주택 구매 수요가 많았지만 당시 대출금리가 높고, 주택 금융도 갖춰져 있지 않아 대출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집을 가진 임대인도 월세나 사글세로는 목돈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임대인들은 주택 구입 과정에서 모자란 자금을 조달하거나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본인의 집을 전세 형태로 임대했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에는 금융기관에서 쉽게 돈을 빌리지 못했으며 부동산과 관련해서는 돈을 빌려주지 못 하게 돼 있었다”며 “그래서 집주인들은 전세 보증금을 받아 목돈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한창 금리가 높을 때는 은행 이자가 10% 이상이었기에 임대인들은 임차인들에게 받은 보증금을 은행에 통째로 예금하기도 했다. 서진형 공정주택포럼 공동대표(경인여대 교수)는 “1960~1970년대는 은행 금리가 15~20% 정도로 아주 고금리였다”며 “집주인들이 전세 보증금을 받아 은행 이자만으로도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입자는 월세처럼 다달이 고정비용이 들어가지 않아 좋고, 집주인 목돈을 마련하고 큰 이자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업화시대에 전세는 집주인과 세입자에게 모두 이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전세제도가 본격화하면서 그 폐해가 심각해졌다. 1980년대 말은 전셋값과 집값이 급등해 힘들어하는 국민이 많아졌다. 정부는 주택을 더 지어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1989년에는 정부가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전세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는 등 임대차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전세금이 폭등하는 결과를 낳았다. 집주인들이 늘어난 기간만큼 전세금을 더 많이 받으려 한 탓이다. 국민은행 통계에 따르면 1989년 서울 전셋값은 29.6% 상승, 1990년에는 23.7% 상승했다. 1990년에는 전세금 폭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생겨나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전세사기도 급증했다. 1970~1990년대는 월세로 집을 빌려 가짜 집주인 행세를 하며 전세보증금을 가로채거나 중개사가 집주인 몰래 이중계약을 해 보증금을 가로채는 등의 전세사기가 발생했다. 집 없는 서민들에게 전세보증금은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여서 전세사기를 당하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서민들의 전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소비자 금융을 대폭 확대했다. 서민들도 은행에서 집을 살 돈을 빌리기가 쉬워졌다. 2004년에는 한국주택금융공사가 출범해 은행에서 전세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신용보증을 서기 시작했다. 이후 은행권에서 전세자금대출 시장에 뛰어들면서 규모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무분별한 전세자금대출과 보증이 전세사기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 발생한 인천 미추홀구 대규모 전세사기 사건의 상당수 피해자들도 전세자금대출을 통해 전세보증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전세보증금이 집값과 같은 주택까지 주택도시보증공사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가입 대상에 포함됐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 할 가능성이 있는 주택까지 보증을 서줘 이를 악용해 전세사기가 발생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세입자 보호 장치를 거의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2013년 이후 급격하게 대출과 보증을 늘렸다”며 “주택담보대출을 할 때는 집값 대비 일정 비율 이상 안 빌려주는데 전세금은 훨씬 더 많이 대출을 해줬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전세금을 얼마나 빌려줄지에 대한 규제 등이 없었기 때문에 전세사기 피해가 커졌다고 본다”며 “많은 OECD 국가들에서는 전세가 활성화되지 않았는데도 ‘월세의 몇 배 정도까지 전세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규제를 해놨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것도 없어 월세의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전세 보증금을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전세자금대출 증가에 따른 시장 변화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52조 원이었던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2021년 184조 원으로 3배 넘게 늘었다.
2010년대에는 주택시장 침체로 집을 사는 것보다 전세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전세가와 매매가 차이가 좁혀졌고, 전셋값이 집값의 70%를 넘어서며 전세보증금이 매매가보다 높은 '깡통주택' 우려가 커졌다. 깡통주택이 많이 생겨나면서 이를 이용한 전세사기 사건이 발생했는데 2018년 원광대학교 근처에서 발생한 세모녀 전세사기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건물주가 노후한 건물을 저렴한 값에 매입해 대학생들을 상대로 상권보다 더 저렴한 전세계약을 체결하고, 학기가 시작된 후 잠적해 학생들이 전세금을 받지 못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수백 명으로 피해액만 100억 원대에 달한다.
최근에 발생하는 전세사기는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피해자들도 대규모다. 지난해 한 남성이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주택 283채를 구입한 후 전세금 31억 6800만 원을 돌려주지 않아 1100세대가 넘게 피해를 봤다. 인천 미추홀구에서는 남 아무개 씨 등 61명이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481가구의 전세 보증금 388억 원을 세입자들에게 받아 가로챘다. 남 씨는 인천과 경기도 일대에 아파트 등을 2700여 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경기 동탄과 구리에서도 몇백 채의 집을 가진 집주인, 부동산 임대업자 등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 임대사업자 제도를 시작으로 다주택자들에 대한 혜택이 늘어났다. 이명박 정부는 전월세 공급을 늘리겠다는 취지로 임대주택사업자에게 취득세나 재산세 감면 혜택을 확대했다. 박근혜·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혜택은 더욱 커졌다. 소형 면적과 장기간 임대 위주로 세제 혜택을 늘리고, 종합부동산세도 면제해줬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부터 다주택 임대사업자가 서울 강남 등의 규제지역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정부는 규제완화를 통해 공급을 늘리려 했지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다주택자들이 연관된 전세사기 피해가 많이 발생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현행법상 임차인이 전세사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말한다. 박상흠 법무법인 우리들 변호사는 “전세사기 속성을 살펴보면 전세계약을 체결한 건물주나 집주인이 애초에 보증금을 빼돌릴 목적으로 계약한 것”이라며 “이들이 의도적으로 보증금을 빼돌리기 위해 계획하면 사실상 피해자들이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전가영 서울시복지재단 변호사는 “사기를 마음먹고 친다고 하면 사실상 지금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며 “깡통전세로 단순히 임대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때 임차권 등기명령 신청이나 내용증명 보내기, 지급명령 신청 등의 방법이 있겠지만 악의적으로 집주인이 잠적하거나 파산한 경우를 대비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민주 기자 lij907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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