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1973년, 시쳇말로 아버지가 ‘달러 빚’을 내서 집안에 텔레비전을 들여 놓으셨다. 그날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기쁨 그 자체였다. 정말 동네잔치를 열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한 일주일 동안은 우리 집을 개방해 동네 친구는 물론 아주머니 아저씨들까지 다 와서 텔레비전을 함께 감상했다.
형편도 안 되는데 아버지가 무리해서 텔레비전을 사신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프로레슬링 경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김일 선수를 너무 너무 좋아하셨다. 김일 선수는 특히 박치기로 아주 유명했다.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 소주를 곁들이며 경기를 시청하는 게 아버지의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김일 선수의 경기는 언제나 드라마틱했다. 상대 선수에게 내내 끌려가다가 다 졌다고 생각했던 순간 특유의 박치기 기술이 작렬하면서 어떤 드라마보다도 극적으로 경기를 역전으로 몰아갔다.
경기 내내 모든 국민을 애타게 만든 김일 선수가 경기 막판 박치기를 보여주면 아버지는 김일 선수와 같이 박치기를 하시면서 완전 몰입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나와 내 동생은 아버지의 박치기를 많이도 맞아야만 했다. 아버지는 경기가 끝나도 나와 남동생에게 “남자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며 박치기를 가르쳐주시곤 했다. 물론 김일 선수처럼 강력한 박치기를 하시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와 동생은 김일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 곁에 가지 않으려 했을 정도다.
나의 아버지가 이제 80대 후반이 되셨다. 기력도 예전 같지 않으시고 기억도 가물가물하시는 날이 점점 더 많아진다. 며칠 전 어머니가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차분하지만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큰애야, 네 아버지가 날 빤히 바라보면서 묻더라. ‘누구시냐, 의사선생님이요? 아니면 간호사 선생이요’라고 말이다. 큰애야. 너 아버지하고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라. 아버지가 그래도 기억이 있을 때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전화를 받고 가슴이 짠해졌다. 언제나 호탕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아내와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신 아버지도 세월의 무게 앞에서 점점 기력과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으로 살아가시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난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그 주말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두물머리(양수리)로 향했다.
다산 정약용 유적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버지를 모시고 한강변을 걸었다. 오랜만의 외출이신 아버지는 걸음은 느렸지만 만면에 미소를 띠고 “기분 좋네. 공기도 좋고 날씨도 좋고. 아, 기분 좋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셨다.
산책 후 부모님을 모시고 근처 장어집으로 향했다. 부모님 모두 장어를 아주 맛나게 드셨다. 난 사실 부모님이 장어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 아버지는 생생한 기억으로 옛이야기를 하시면서 맛나게 장어를 드셨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오늘은 아주 정신이 맑으신 것 같다”고 하셨다.
부모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불쑥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너 전두환 대통령한테 돈 받았니?”
나는 아버지에게 “전두환 대통령에게 무슨 돈을 받아요. 아버지 전 대통령 작년에 사망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전 대통령이 죽었어?”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아니, 내가 뉴스에서 전 대통령이 모든 국민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나눠준다고 한 걸 봤는데 전 대통령이 돈 안 줬어?”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에게 눈짓을 하시며 말했다.
“여보 돈 조금만 기다리면 준대요.”
이번 어버이날 소소하지만 현금을 준비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에게 어버이날 용돈 하시라고 드리면서 “아버지 제가 돈 잘 받았습니다”라고 말한 뒤 “아버지, 빨리 기력 찾으셔서 저랑 김일 선수 레슬링 보러 가자고요”라고도 말씀 드릴 거다.
아버지가 어버이날 용돈으로 맛난 것도 드시고 김일 선수 레슬링도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다. 부모님에게 매일매일이 어버이날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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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