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적으로 제작 시장 규모 확대와 역량 강화 예상…제작비 인플레이션과 토종 OTT 경쟁력 타격은 숙제
#넷플릭스, 지상파 3사보다 투자 규모 커
지난 4월 25일(현지시간)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CEO(최고경영자)는 윤석열 대통령을 미국 워싱턴 DC에서 접견한 자리에서 향후 4년간 25억 달러(약 3조 3080억 원)를 한국 드라마·영화·리얼리티쇼 등 K-콘텐츠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한 2016년 이후 현재까지 투자한 누적 투자 금액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넷플릭스의 투자 확대는 한국을 주요한 콘텐츠 제작 허브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해 12월 방송통신광고통계시스템(코바코)에서 나온 ‘K-OTT 플랫폼의 해외시장 진출 활성화방안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2021년 3~4분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국가별 인기도 순위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넷플릭스와 K-콘텐츠가 서로 ‘윈-윈’한 셈이다. 넷플릭스의 투자 계획 발표에 국내 콘텐츠 제작 업계에서는 환영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넷플릭스 수요가 늘면서 시장 규모가 커지고 국내 제작업계의 역량도 강화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K콘텐츠의 글로벌 위상 강화로 인한 낙수효과도 예상된다. 예컨대 CJ ENM 산하의 스튜디오드래곤과 CJ ENM 스튜디오스에서 배급하는 킬러콘텐츠 대부분이 티빙뿐만 아니라 넷플릭스에서도 송출되며 시청자를 끌어모으고 있다. 지난해 KT그룹의 방송채널인 ENA에서 방영해 히트 친 ‘이상한 나라의 우영우’ 역시 시청률과 넷플릭스 이용률을 동시에 잡았다는 평가다.
콘텐츠 제작업계 한 관계자는 “핵심은 넷플릭스를 통해 송출됐다고 해서 시청률이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넷플릭스로 보다가 재미가 붙어서 실시간 시청으로 갈아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국내 배급사들이 경쟁력 있는 킬러 콘텐츠를 송출하면서 넷플릭스라는 배급망을 이용하지 않을 까닭이 없는 셈이다. K콘텐츠의 전체적인 위상 강화에 힘입어 덩달아 글로벌 인지도를 높이게 되는 점도 긍정적인 효과로 꼽힌다.
문제는 중장기적으로 넷플릭스에 대한 국내 콘텐츠 산업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질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넷플릭스가 밝힌 투자 계획에 따르면 향후 4년간 한 해에 약 8000억 원이 K콘텐츠 제작에 투입된다. 국내 지상파 3사와 유료방송 업계의 제작비 규모는 한 해에 3조 원에 채 못 미친다. 지상파 3사가 제작에 투입하는 비용이 대략 7000억~8000억 원 선이다. 그런데 한 사업자가 지상파 3사를 능가하는 규모의 제작비 투자를 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국내 제작자 입장에서는 주요 고객이 지상파가 아닌 넷플릭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제작비 인플레이션 이슈와 더불어 ‘넷플릭스가 좋아하는’ 콘텐츠가 양산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2016년 넷플릭스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제작비가 급증했다. 앞서의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넷플릭스가 전반적인 제작비 상승을 부추겼다. 투자받지 못하는 중소 제작사들이 정말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다”며 “넷플릭스 투자를 받기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도 지나치게 늘어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넷플릭스가 투자처를 바꿀 경우 국내 미디어 시장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법무법인 세종 수석 전문위원인 이종관 ICT 박사는 “국내 제작비 단가가 계속 오를 경우 향후 매력도가 점차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넷플릭스는 언제든 다른 가성비 좋은 콘텐츠 공급처를 찾아 떠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부담 가중된 국내 OTT…정책적 육성 노력 필요 지적도
넷플릭스 투자를 두고 단기적인 시장 성장에 안주할 게 아니라 토종 OTT 사업자의 콘텐츠 제작 경쟁력 등 국내 사업자들의 미디어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숙제로 남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국내 토종 OTT 사업자들의 투자 여력이 이미 한계에 달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티빙과 웨이브는 각각 1192억 원, 1217억 원의 적자를 냈다. 티빙의 모회사인 CJ ENM 역시 지난해 엔데버 스튜디오 인수 여파로 수익성이 악화한 데다 음악과 뮤지컬 부문을 제외하고는 실적을 내지 못한 까닭에 올해 투자 여력이 충분치 않을 것으로 분석된다. 웨이브에 투자하는 지상파3사 역시 카타르 월드컵 중계로 실적 개선 요인이 있었으나 전반적인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고심이 깊어지는 모양새다. 중소 OTT인 왓챠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왓챠는 지난해 누적 결손금이 약 2388억 원에 달하면서 2022년 감사보고서에서 ‘계속기업으로서 존속 능력에 의문이 제기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OTT 사업자 입장에서는 콘텐츠 투자 외의 생존전략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신규로 론칭되는 콘텐츠 여부에 따라 월별 가입자수에 곧바로 변동이 나타나는 까닭이다. 가입자 유지를 위해서라도 출혈을 감수하며 계속 제작비를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문행 수원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넷플릭스가 3조 원이 넘는 추가 투자를 하면 제작 인력이나 출연 배우 등의 수요가 올라가면서 제작비 인플레이션 현상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토종 OTT로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는 올해 1분기 2조 2600억 원의 흑자를 내며 순항하고 있다. 이미 전세계에서 2억 3300만 명의 구독 가구를 확보했다. 특히 지난해 11월에 신규 론칭한 광고요금제 효과도 톡톡히 봤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문행 교수는 “이미 국내 사업자들이 정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티빙이나 웨이브가 해외 수출을 통해 파이를 키우려 다소간 노력하고 있지만 당장의 성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 격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적으로 국내 OTT 사업자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종관 박사는 “개별 기업이 분투해서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정부가 토종 OTT의 해외 진출과 관련해 글로벌 현지화와 재제작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줄 필요가 있다. 세액공제 폭을 올려 제작비 투자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과 콘텐츠 제작 사업자들을 위한 펀드를 만들어 비용을 지원해주는 노력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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