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재계 서열 13위 총수이자 전직 주지사가 1억 달러 투자 추진…한국 전초기지 삼아 해외진출 노려
디즈니 플러스에 스트리밍된 드라마 ‘카지노’는 학원 강사로 일하다 필리핀 카지노왕이 된 가상 인물 차무식 일대기를 다뤄 인기를 끌었다. 차무식이 우연치 않게 필리핀 막후 실세 ‘빅 보스’를 만나 탄탄대로를 걸으며 지역 카지노 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많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으로 불리다 최근 전세사기 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된 남헌기 동해이씨티 회장도 학원 강사 출신이다. 인하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 대위로 군복무를 마친 남 회장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입시·외국어·컴퓨터 학원 등 100여 곳을 설립 및 운영했다. 그러다 2010년부터 남 회장은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미추홀구의 ‘건축왕’이 됐다.
‘건축왕’ 스케일은 남달랐다. 남 회장은 기존의 갭투자 전세사기 공식을 비틀었다. 본인이 직접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로 자금을 조달해 건물을 지었다. 남 회장은 준공한 건물을 분양하는 방식이 아니라 임대를 통해 자금을 회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 보증금은 PF 대출 원금을 갚는 용도가 아닌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활용됐다고 한다. 남 회장 일당이 이런 작업을 반복하며 보유한 주택 수는 2700여 채 규모다. 검찰은 161채 전세보증금 125억 원을 남 회장 일당이 가로챘다고 보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미추홀구에서 영토를 확장해나가던 남 회장은 2017년 9월 강원도 동해시 괴란동 178만㎡ 규모 임야를 경매로 낙찰 받았다. 동해 망상지구 개발사업 계획에 포함된 부지였다. 망상지구 개발사업은 최문순 전 강원도지사 역점 사업이었다. 동해안권경제자유구역청(동자청)을 설립해 경제자유구역으로 개발사업에 돌입했다.
남 회장이 구입한 괴란동 부지는 망상 제1지구 부지 총면적 40%에 해당했다. 그런데 시행사업자로 선정이 되려면 토지 지분율이 50%를 넘어야 했다. 2018년 동자청은 망상지구 전체 면적 부지를 돌연 축소했다. 남 회장 토지 지분율은 53%로 사업 요건을 갖추게 됐다. 당시 상황을 두고, 동자청이 남 회장에게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2021년 8월 31일 강원도 동해시 동해보양온천컨벤션호텔에선 동해안권경제자유구역 망상 제1지구 개발사업 투자양해각서(MOU) 체결식이 열렸다. 이날 체결식엔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물이 자리했다. 정욱 현대자산운용 대표이사, 신동학 동자청장, 방창진 한국투자증권 본부장 등이다.
MOU 체결식 중앙엔 남 회장과 최문순 전 강원도지사가 섰는데, 둘 사이엔 흥미로운 인물이 있었다. 필리핀 재계서열 13위인 LCS그룹의 총수 루이스 차빗 싱손 회장이었다. 이날 MOU 체결식의 진짜 주인공은 싱손 회장이었다. 카지노의 차무식처럼 필리핀 유력자가 남 회장의 후원세력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행사에서 최문순 전 지사는 “망상지구 개발사업 투자를 위해 참석한 싱손 회장과 관계자 여러분께 강원도민을 대신해 감사드린다”면서 “강원도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됐을 때 아무도 이곳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이곳 동해시에 투자를 결심해준 남헌기 회장에게도 감사드린다”고 했다.
최 전 지사는 “필리핀에서 재계 13위인 LCS그룹이 동해안권경제자유구역 망상 제1지구 사업에 투자를 해줘 앞으로 동해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본다”고 기대했다.
이 자리에서 싱손 회장은 “LCS그룹은 망상지구 개발사업 성공을 위해 투자를 결심했다”면서 “강원도가 추진하는 동해안권경제자유구역 망상 제1지구 사업 성공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이 사업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남헌기 회장은 “LCS그룹과 개발사업 투자양해각서 체결을 하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LCS그룹은 망상 제1지구 사업 주거·사업·리조트개발에 1억 달러(1350억 원 규모)를 투자하며, 한국투자증권과 현대자산운용은 국내 및 해외에서 투자자금 조달과 금융업무를 담당한다”고 했다.
협약에 따르면 LCS그룹은 2021년 7월부터 2025년 7월까지 총 1억 달러를 동해 망상 제1지구 개발에 투입하기로 했다. 협약을 진행하면서 남 회장과 필리핀 재벌 싱손 회장은 손을 맞잡고 활짝 웃었다.
남 회장은 2021년 11월 ‘강원지방신문’ 인터뷰를 통해 “2021년 9월 23일 LCS그룹이 1억 달러 국내직접투자 신고를 완료하고, 협약 이행에 대한 보증금 성격으로 100만 달러를 국내 은행에 송금했다”면서 “강제성 없는 MOU 체결 한 달여 만에 100만 달러를 송금한 건 협약 이행에 대한 강한 의지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동해 현지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필리핀 재벌로 알려진 싱손 회장이 1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 자체가 망상 제1지구 개발사업 신뢰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면서 “그 정도 외화가 투입된다면 개발사업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고 했다.
LCS그룹은 필리핀 현지에선 국민적 인지도를 가진 기업이다. 90억 페소(2157억 원 규모) 가치를 지닌 광산 개발업을 비롯해 건설, 대중교통, 소매, 전력(태양광 등), 온라인, 엔터테인먼트(동물원 등)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LCS가 필리핀 굴지 대기업을 부상할 수 있었던 이면엔 싱손 회장의 존재감이 있었다.
LCS그룹 홈페이지에 따르면 싱손 회장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기업을 이끌어왔다. 남다른 안목으로 수익을 창출할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내용이 LCS그룹 측 공식 설명에 담겨 있다. 싱손 회장은 자신의 고향인 비간(Vigan)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데에도 역량을 쏟은 것으로 전해진다.
싱손 회장 커리어도 화려하다. 그는 필리핀 북부 나르바칸 주지사를 역임한 정치인 출신이다. 필리핀 지자체 연맹 회장 직을 수행했을 정도로 현지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LCS 그룹 홈페이지 따르면 싱손 회장은 필리핀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 중 한 명이며, 여러 다른 선출직 외에도 자신의 지역구에서 30년 동안 주지사로 재직했다는 내용이 게시돼 있다. 각자 다른 대통령이 재임할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필리핀 역사 전반에 걸쳐 여러 기록을 남겼다는 설명도 있다.
싱손 회장은 필리핀을 넘어 세계로 진출하려는 절차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첫 번째 해외 전초기지는 바로 한국이다. 싱손 회장은 한국 시장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LCS그룹은 첫 해외 지사인 LCS코리아를 설립하면서 한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LCS그룹은 LCS코리아 주력 사업 3가지를 △부동산 △KP 디벨롭먼트 통신타워 프로젝트 △제네시스 BBQ라고 설명했다. KP 디벨롭먼트 통신타워 프로젝트는 한국 기업과 협력해 필리핀 내 랜드마크 격 타워를 짓는 프로젝트다. 제네시스BBQ는 한국 요식업 프랜차이즈 BBQ를 필리핀 현지에 수입하는 사업이다. 부동산 프로젝트는 동해이씨티 개발사업이다.
이 중 KP 디벨롭먼트는 국내에 등기된 기업으로 파악됐다. 2020년 11월 11일 사명을 LCS코리아로 바꿨다.
2022년 6월 23일 LCS그룹은 LCS코리아 대회의실에서 강원도 삼척에 공장이 있는 B 사와 1000만 달러 규모 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B 사는 LCS그룹 투자를 받은 2달 뒤 삼척 대진항에 저탄소 특수선박공장 착공에 돌입했다.
착공식 행사에서 B 사 회장으로 참석한 노 아무개 씨는 LCS코리아 CEO(최고경영자)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노 회장은 1987년생이었다. 업계에 따르면 노 회장은 LCS그룹 한국 진출 사업 전반을 총괄하고 있는 핵심 관계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기준 B 사는 사명을 변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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