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로 인해 풍비박산난 집안이 있다. 국내 정치풍자 영화의 효시로 꼽히는 <잘돼갑니다>의 제작자 김상윤 씨 집안의 얘기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김 씨는 당시 많은 돈을 들여 경무대(옛 청와대)의 비화를 다룬 영화를 제작했으나 정권의 상영 불가 판정으로 인해 영화는 그대로 사장됐다.
제작자인 김 씨의 집안은 졸지에 빚더미에 올랐고 김 씨의 사망과 함께 일가족의 비극은 시작됐다. 그간 김 씨의 가족들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문화예술에까지 공권력을 동원했던 독재정권의 행패를 알리고 부당한 억압으로 인한 피해보상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가족들은 여전히 암흑 속을 헤매고 있는 실정이다.
제작자 김 씨의 장남 김형주 씨를 만나 무려 4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가족의 기막힌 사연을 들어봤다.
장남 김 씨는 “벌써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정부는 우리 집안의 억울한 사연에 귀를 막고 있다. 겉으로는 민주화 보상을 떠들어대면서도 독재권력하에서 몰락한 일가족의 한 맺힌 절규에는 과거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말로 외면하고 있다. 우리 가족이 40년 동안 당한 억울함은 대체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나”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제작자 김상윤 씨는 1967년 10월 31일 영화 <잘돼갑니다>를 당시 공보부에 신고한 후 제작에 착수했다. 원작은 <동아방송>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한운사 씨의 동명(잘돼갑니다) 라디오 연속극이었다. 영화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가 경무대 시절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3·15 부정선거, 이 전 대통령의 하야와 망명,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등을 다룬 이 영화는 국내 최초의 정치 풍자물로 촬영 시작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영화 제목은 어수선한 정국하에서 이발사가 대통령에게 무조건 “잘돼갑니다”라는 말로 응수할 수밖에 할 수 없었던 현실을 비꼬는 동시에 부패한 참모진, 권력 집단의 행태를 조롱한 것이었다.
군 특무대 근무 경험으로 이승만 정권의 비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김상윤 씨는 독재정권의 실상과 말로를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고심 끝에 영화제작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원작자 한운사 씨는 “<잘돼갑니다>는 장기집권과 혼탁정치, 부패정치 등을 국민에게 알리고 꼬집는 우리나라 최초의 경무대 비화를 다룬 민주화 영화다. 1959년 봄 우연히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를 만나 경무대 내의 여러 가지 얘기를 듣고 이러한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이후 영화화를 위해 여러 제작자와 감독을 만났으나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중 김상윤 씨가 제작의사를 밝혀왔다. 김 씨는 ‘영화로 만들어 국민들에게 알리고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보탬이 되어야 한다’며 대단한 열의를 갖고 제작했다”고 증언했다.
▲ 영화 <잘돼갑니다>의 스틸. |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완성된 영화는 개봉 전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고 1971년 국도극장의 추석 특선프로로 정해져 예고편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장안에는 ‘볼만한 영화가 개봉한다’는 입소문이 돌며 일찌감치 흥행이 예고되기도 했다. 특히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홍종철 문공부 장관이 눈물까지 흘린 사실이 회자되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남 김 씨는 “개봉 하루 전 느닷없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요원들이 들이닥쳐 간판을 떼고 무기한 영화상영 불가 통보를 해왔다. 이에 항의하는 아버지는 일주일이나 감금돼 무시무시한 협박과 회유를 당했다. 영화 완성 직후부터 주무부서인 문공부는 영화 내용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아버지는 추가로 많은 돈을 들여 8차례나 개작요구를 이행했다. 시정 사항은 거리를 누비는 데모 대열, 법석대는 민주당사 앞, 대학교수 데모 내용을 단축하라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검열 당국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음에도 영화는 끝내 ‘상영불가’ 판정을 받고 필름도 압수당했다”고 주장했다.
흥행 성공을 자신하며 열의를 다해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던 김상윤 씨로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필름압수와 개봉 불가를 둘러싸고 영화계 안팎에서도 뒷말이 무성했는데 메가폰을 잡았던 조긍하 감독은 “이젠 영화를 포기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크게 상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필름 압수보다 더욱 큰 문제는 자금난이었다. 영화가 개봉조차 못해 제작비를 환수하지 못한 것은 치명타였다. 특히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던 제작비 4000만 원에 더해 추가 개작비용 등 막대한 재산상 손해를 입은 김상윤 씨는 빚더미에 올랐고 집안은 졸지에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김상윤 씨는 생계유지와 빚 청산을 위해 다른 영화제작에 착수했지만 빚독촉 스트레스와 울화병으로 얼마 후 쓰러지고 만다. 3년을 반신불구로 투병하던 김 씨는 “이 영화는 독재정권 하의 정치인들이 꼭 봐야 한다. 내가 죽더라도 이 영화는 꼭 세상에 선보여야 한다”는 유서를 남긴 채 1975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당시 김상윤 씨가 투병 끝에 사망하자 가족들은 더욱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김 씨의 부인은 피출부와 외판원 등의 일을 하며 생계를 연명했고 가족들은 사글세방을 전전하다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장남 김 씨는 “이 와중에서도 어머니와 우리 남매들은 탄원서를 만들어 청와대와 공보부를 수백 번 이상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공권력을 이용한 불법 필름압수로 인해 우리 가족이 겪은 경제적 피해를 보상하고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1979년 4월에는 매번 헛걸음만 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내 동생이 청와대로 찾아가 담당자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청와대 경비경찰들은 재수생이던 내 동생을 수십 차례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한참 후 정신을 차린 동생이 깨어난 곳은 서울시립 정신병원이었다. 폭행 후유증으로 정신장애 2급 진단을 받은 동생은 결혼과 취직은 고사하고 34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신병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 영화 <잘돼갑니다>는 21년이 지나 상영했지만 세월의 벽을 넘지 못했다. 왼쪽부터 상영관을 찾는다는 기사, 영화 상영을 요구하는 진정서, 5공 시절 상영허가를 조건으로 작성한 각서. |
김 씨는 “합법적으로 만든 영화를 부당한 공권력을 이용해 무려 21년간 상영을 못하게 했다가 더 이상 막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갑자기 필름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더욱 울분이 터지는 것은 뒤탈이 없게 하려고 치졸한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필름을 되돌려주는 조건으로 우리 가족에게 강제 각서를 쓰게 했다. ‘상영허가를 해줄 경우 영화와 관련된 모든 사항에 대해 진정과 청원 등을 하지 않겠으며 제반 사항에 대해 손해배상청구 등 일체의 민·형사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각서를 쓰지 않으면 필름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문공부 간부의 말에 우리 가족은 그가 작성한 각서를 베껴 쓰고 도장을 찍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2장의 각서를 보여줬다.
어쨌거나 20년 만의 해금에 대해 당시 많은 언론들은 “제작자 유족들의 피나는 투쟁의 결과로 영화가 21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독재정권에 희생됐던 영상예술의 뒤늦은 복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도 허무했다. 20년이 넘는 세월의 한계에 부딪혔던 것이다. 1989년 9월 명보극장 추석특선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이 영화는 관객 3500명이라는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9일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영화 흥행 참패로 인해 김 씨 가족들은 6억 원이라는 빚을 추가로 떠 앉았고 또 다시 시작된 빚 독촉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상영중단 통보를 받은 김상윤 씨의 부인은 결국 음독자살을 시도, 나흘 만에 깨어났으나 정부 차원의 보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지병으로 7년 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장남 김 씨는 현재 뜻있는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법적 소송을 계획 중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보상을 기대했지만 더 이상은 어렵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정부는 강제 각서까지 쓰게 해 오랜 시간동안 법적 소송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청와대 비서관 등 정부관계자들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기다려보세요’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화보상위원회와 인권위원회에 수차례 진정을 넣었지만 과거 정권의 사건이고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고 말했다.
국내 정치영화의 시효로 불리는 이 영화를 둘러싼 수난은 영화 제목과는 반대로 김 씨 가족의 수난사와 맞물려 있다. 김 씨 가족이 영화를 억압과 통제의 도구로 사용했던 정권의 희생양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40년동안 표류해온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