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레인에서 체포된 김현희(왼쪽)가 1987년 12월 15일 김포공항으로 압송됐다. 오른쪽은 안기부 최초 여수사관인 최창아 씨. 연합뉴스 |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그 ‘저의’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친노그룹이 주류인 현 민주통합당에 상당한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종북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이때 불거진 김현희의 ‘KAL기 폭파범 가짜 만들기’ 주장은 그 자체로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일요신문>은 김현희를 아부다비에서 체포해 한국까지 압송한 당시 안기부 여성수사관 최창아 씨의 수사비록 ‘김현희와 나’를 현재 연재 중이다. 김현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수사관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잊혔던 KAL기 폭파 사건의 실체와 지난 정권의 ‘김현희 죽이기’ 전모를 추적해 봤다.
지난 6월 18일 TV조선 <최·박의 시사토크 판>에 출연한 김현희(50)는 “제가 가짜면 KAL기 폭파사건도 가짜입니다”라고 외쳤다. 감정이 격해질수록 북한 억양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지난 1997년 결혼 이후 15년 만에 방송에 얼굴을 비쳤고 토크쇼에 출연한 것은 처음이었다. 김현희는 지난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지난 노무현 좌파 정부가 나를 가짜로 내몰았다”며 “이를 위해 국정원과 국가인권위원회, 지상파 방송 3사 및 종교단체가 합심해서 나를 공격했다”며 울분을 토한 바 있었다.
이번 방송 출연으로 김현희는 “내가 KAL기 폭파사건을 일으킨 북한 공작원”이라고 확실히 못 박았다. KAL기 폭파사건이란 1987년 11월 28일 밤 11시 27분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를 거쳐 방콕으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858편 보잉 707기가 29일 오후 2시 5분경 버마 인근 해역 상공에서 공중 폭발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바레인 현지에 급파된 우리 수사팀은 12월 7일 현지 수사를 종결하고 “KAL 858기 폭파는 북한에 의한 테러”라고 공식 발표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사건에 관해 한 일간지 기자는 “김현희가 붙잡히지 않았거나 김승일(김현희와 함께 KAL기 폭파 사건을 주도한 인물로 바레인 현지 경찰 조사 과정에서 독약 앰플을 들이마시고 자살)처럼 죽었다면 이 사건은 영영 미궁 속에 묻혔을 것이다. 자칫하면 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김현희는 안기부 수사 과정에서 끊임없이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행세한 탓에 한·중·일 삼국을 긴장시켰다.
KAL기 폭파사건은 현지 수사가 다소 급하게 진행되고 항공기 블랙박스를 회수하지 못한 채 김현희의 증언에 의존하면서 갖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처음에는 그저 큰 사건에 뒤따르는 음모론 정도로 치부됐지만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풍 기획’ 의혹으로 커지기 시작해 2003년 참여 정부 이후 의구심은 증폭됐다. 이 가운데 2003년 11월 18일 MBC <PD수첩> ‘16년간의 의혹, KAL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편이 도화선을 당겼다.
당시 <PD수첩> 방송에 관해 김현희는 “내가 (취재 협조를) 거부하니까, 국정원에서 내 남편을 불러 ‘방송 출연은 하지 말고 국정원 안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을 모셔놓고 설명회를 갖는 걸로 하자’고 제안했다. 남편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바로 그 시각에 MBC <PD수첩>팀이 내 거주지로 들이닥쳤다. 나는 갓난아기를 업고 한밤중에 피신해야 했다”고 전했다. 김현희의 거주지는 국정원 내 일급 보안 사항으로 국정원 고위 관계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보를 얻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이한영 씨 역시 거주지 노출로 살해된 바 있다.
<PD수첩> 보도 이후 KAL기 폭파 사건은 재조사에 들어갔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이 사건을 ‘7대 우선조사대상 사건’으로 선정해 다각도로 조사했지만 2006년 8월과 2007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작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런가 하면 2007년 중국에서 6자회담이 열렸을 당시, 리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은 사석에서 “우리는 KAL기 사건 이후 한 번도 테러를 일으킨 적이 없다”는 발언으로 북측이 KAL기 폭파사건을 일으켰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KAL858 조작설’과 ‘김현희 가공설’은 사건 25년이 지났음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작을 의심하는 이들은 안기부가 공개한 김현희의 어린 시절 사진에 강한 의구심을 품었다. 당시 안기부에서는 김현희가 북한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김현희는 72년 11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절위 2차 회담에 참석한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건넨 바로 그 소녀”라며 사진 1장을 공개했지만 김현희의 귀 모양과 다르다는 것이 입증되며 가짜로 판명됐다. 하지만 이후 보강수사에서 김현희는 꽃을 건넨 소녀가 아닌 3번째 줄에 있던 화동이었다는 것으로 정정됐다.
또 KAL기 폭파사건이 87년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기획이라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지만 김현희는 “공작 임무를 받고 북한을 떠날 때도 대통령 선거가 있는 줄 몰랐다. 오직 88서울올림픽 저지가 목표였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선거와 연관돼 정치적 사건이 됐다”고 반박했다. 앞서의 기자 역시 “KAL기 사건으로 보수층 결집 효과가 나타난 측면도 있지만 87년 대선의 노태우 승리는 YS와 DJ의 양김 분열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라고 전했다.
지난 정권의 거듭된 조작설 제기와 재조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김현희였지만 TV조선 방송에서만큼은 “당시 바레인 공항에서 독약 앰플을 깨물고 죽었어야 했다”며 그간의 고통을 숨기지 않았다. 외교통상부 소속 한 대사는 “참여 정부가 이렇게까지 조직적으로 ‘김현희 지우기’에 나섰는지 몰랐다. 아마도 대북지원을 늘리는 과정에서 김현희의 존재가 불편했던 것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지난 정부에서 KAL기 폭파 사건 직후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린 것을 철회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MB정권이 들어선 지난 2008년 9월에서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 김현희는 현 정권에 관한 불만도 숨기지 않았는데 “‘김현희 가짜몰이’는 대한민국 역사를 뒤흔드는 엄중한 범죄다. 그동안 수차례 이명박 정부에 호소했지만 방치되어 왔다. 지금 대통령께서 알고나 계실지”라며 전·현 정권 인사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방송 직후 새누리당에서는 ‘김현희 진상조사특위’를 만들어 실제 정권 차원의 ‘김현희 가짜 만들기’가 있었는지, 또 이 과정에서 국정원이 개입했는지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KAL858기 사건 시민대책위 안 아무개 씨는 “대선을 앞두고 공안 정국을 만들려는 정당과 보수 언론의 합작품”이라며 “김현희는 115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인 범죄자이며 평생 유가족을 도우며 자숙을 해도 부족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전 국민이 다 볼 수 있는 TV에 나와서 태연히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민주통합당의 한 보좌관 역시 “김현희는 지난 정부의 재조사 과정에서 유가족들과의 만남 및 공개 토론 제안을 번번이 고사했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보수 성향의 언론사와 인터뷰를 갖고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속내를 비쳤다.
한편 KAL기 폭파사건을 9년간 파헤치고 있다는 김성국 신부는 SNS를 통해 “김현희의 방송 출연이 씁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로 삼고 싶다. 그녀의 TV조선 출연이 대선 정국과 맞물려 공안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지만 그것보다 KAL기 폭파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사회적 관심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며 이번 김현희의 주장이 새로운 도화선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조작? 우릴 바보로 보나”
안기부(현 국정원) 소속 최초 여수사관이자 5년 동안 김현희를 지켜본 최창아 씨. 그가 KAL기 폭파사건과 김현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쓴 수기는 현재 <일요신문>에 ‘최창아 씨 수사비록-김현희와 나’를 통해 연재 중이다. 그는 김현희의 안가 생활을 지켜본 5년 동안 미움과 동정이 교차했었다고 한다. 지난 21일 김현희의 방송 출연 이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몇 년 동안 지켜본 최창아 씨에게 김현희의 충격 주장에 대한 입장을 들어봤다.
―김현희가 방송에서 지난 정권에서 받았던 고초에 관해 털어놨다.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가.
▲어제 방송을 보고 나도 좀 놀랐다. 국정원에서 이민을 가라고 압박했다는 말도 하던데 직접적으로 그렇게까지 했을까. 완곡하게 이야기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잘 모르겠다.
―피해의식 때문에 과도하게 부풀린 면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김현희가 지난 정권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쉽게 억울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만 자신을 ‘가짜’로 만들려는 데 대한 불만으로 방송에 출연하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한다.
―KAL기 폭파 사건은 오랫동안 조작설에 시달려 왔다.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으로서 기분이 어땠는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당시의 수사관들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에 점점 화가 났다. 가까운 지인들조차 “진짜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이 사건을 수기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 역시 조작설에 대항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2003년 한 방송사(MBC <PD수첩>)에서 김현희의 집까지 찾아가는 장면을 보고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혹시 조작설을 일축할 만한 증거를 갖고 있지는 않은가.
▲KAL기 폭파 사건 자체가 진실인데 더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이미 법정 조사에서도 북한 소행이라는 결론이 났고 이제는 조작설을 믿는 사람들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안기부를 그만둔 이후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했던 귀순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김현희의 6년 후배’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당시 북한 공작원들 사이에서는 KAL기 폭파 사건이 ‘실패한 공작’으로 회자됐다고 했다. 사건 이후 교육받던 여자 공작원들을 모두 해산시켰다고 말했다.
―최근 김현희를 만난 적이 있는가.
▲김현희가 안가를 떠나고 나 역시 안기부를 그만둔 뒤로는 왕래가 없었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오래된 인연이다. 지금도 당국의 신변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인데 내가 먼저 찾거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수]
▲ 1993년 김현희가 최창아 씨한테 보낸 생일축하카드. |
“냄새난다” 흉보던 ‘정 선생’과 결혼
현재 <일요신문>에서 단독 연재 중인 ‘김현희와 나’에 관해 한 독자는 “읽다보면 KAL기 폭파사건이 실제로 북한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수사비록은 KAL기 폭파사건의 전모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여자’ 김현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연재 초기부터 독자들의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향후 연재에서 사면복권된 이후 김현희의 안가 생활상을 최초로 공개할 예정이다.
최창아 씨는 자신의 수사비록에서 김현희의 알려지지 않은 인간적 면모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김현희는 인간성이 배제된 채 철저히 교육받은 ‘무서운’ 공작원이지만 법정에서 자신의 화장품을 압수당하는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는 천상 여자였다. 당시 바레인에 급파된 수사관들은 김현희가 북한인이라는 사실을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미 알았다고 한다. 비행기 안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버티던 김현희가 소변 채취를 위해 주사관을 꽂는 순간 “어엄마아”라는 비명을 지른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수사관들은 그가 북한 출신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1988년 1월 15일 있었던 기자회견은 전 세계에 북한 여자공작원의 존재를 최초로 알리는 사건으로 회자된다. 기자회견을 앞둔 김현희는 극도로 긴장했고 안기부 수사관들 역시 행여나 그가 자해하지 않을까 줄곧 감시했다. 그는 기자회견 후 자신의 모습이 TV 화면에 비치자 “어유 참”이라며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김현희는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던 당시 언론 보도 등을 미리 접하며 사면될 것을 직감했다. 당시 이례적인 사면복권에 관해 최창아 씨는 “사면복권하지 않으면 사형수 신분으로 계속 구금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으로 보호 관리하는 것과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사면복권된 이후 오랫동안 안가에서 생활한 김현희는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점차 수사관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는 한국계 일본 가수인 야마구치 모모에와 조용필 카세트테이프를 늘어지도록 들으며 종종 수사관들과 노래방을 가기도 했다.
1997년 12월에는 자신을 보호 관리하던 안기부 직원 정 아무개 씨와의 결혼으로 화제를 낳았다. 정 씨는 당시 김현희가 여수사관들에게 “정 선생은 노총각이라 그런지 냄새도 나고 성격도 어찌나 느린지”라며 자주 흉을 보던 사람이었기에 결혼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다들 무척 놀랐다고 한다.
김현희의 마지막 안가 생활은 주로 신앙생활로 이루어졌다. 책 출간 이후 전국으로 간증 강연을 자주 다닌 김현희는 제주도를 가장 좋아했는데 대한항공이 아닌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