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찾은 캠퍼스, 그가 기억하는 전주의 5·18…“남은 친구들이 좋은 세상 못 만들어…만감 교차”
"천지가 개벽했네요."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에 있는 전북대학교 일대는 전북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번화가다. '전대 앞' 혹은 '북대 앞'으로 불리며 '젊음의 메카'로 상징된다. 캠퍼스 곳곳은 한옥으로 꾸며져 젊은 층 사이에선 데이트 명소로도 유명하다.
전북대 공과대학 79학번인 전 씨는 "우리 학교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의 기억 속 캠퍼스는 학생과 군인들의 구호나 비명 등이 뒤엉키고 혈흔이 낭자한 곳이다.
"입학할 때부터 설렘 같은 건 없었어요. 1979년이었으니까 유신정권 체제가 공고했을 때였죠. 2학년 학기 초까지 아주 잠깐 희망 같은 건 있었던 것 같아요. 박정희 사망 후 서울의 봄이 찾아왔잖아요. 물론 허튼 기대였지만."
그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에 가입하며 소위 '운동권'에 발을 들였다.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은 바로 옆 서클 동갑내기 이세종 열사,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첫 번째 희생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이세종 열사가 5·18 민주화 항쟁의 첫 번째 희생자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1980년 5월 17일 광주로 향하던 계엄군은 늦은 밤 전북대에 먼저 들어가 진압작전을 폈는데 농성 중이던 이세종 열사는 자정이 넘어 군인들 폭력으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에야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와 이동근 전북대 교수 등 학자들의 연구로 역사가 드러나 1998년 5·18 사망자로 인정되고 이듬해 국립 5·18민주묘역에 안치돼 첫 희생자로 인정받았다.
전 씨에게는 언제나 이세종이 첫 번째 희생자였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도 또렷해 한 순간도 희미해진 적 없었기 때문이다.
전 씨는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해 5월 14일로 가고 싶어 한다. 전주에는 부슬비가 내렸고 학생들 사이에선 계엄령이 확대됐다는 말이 나돌았다. 소문이 확산하자 운동권 간부 가운데 일부는 학교에서 피신했고 몇몇만 농성장에 남아 '군부타도' 등 구호를 외쳤다.
소문은 다음날 거짓으로 확인됐다. 그러자 피신한 간부들에 대한 비판이 터지기 시작했다. '맞서 싸울 생각을 해야지 왜 도망갔냐'는 책임론이 일었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군부와 맞서 싸운다'는 결의로 이어졌다. 특히 혈기왕성한 1~2학년 사이에서 대세론으로 굳어졌다.
"그 뒤로 학생들의 사기가 꽤 높아졌죠. 토요일인 5월 17일에는 특히 분위기가 좋았어요. 학내에서 집회하고 시내에서 가두행진도 했거든요. 이석영 전북대 교수님께서 캡틴큐(양주)에다 통닭을 사줬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 맨날 소주에 마른안주나 먹던 학생들이 얼마나 신났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비극이에요. 그게 최후의 잔치가 될 줄은…참."
전 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학생들은 밤샘농성에 돌입했다. 밤 11시 조금 넘은 무렵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도부는 사전 회의에 따라 후일 도모를 위해 농성장을 빠져나갔고 전 씨와 이세종 등 1~2학년 대부분은 대항을 선택했다. 나흘 전 다짐 때문이었다.
하루를 넘길 쯤 바깥에서 육중한 굉음이 들렸다. 창밖을 보니 군인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장갑차를 에워싼 대열로 교내로 진입한 상태였다.
학생들은 함께였지만 큰 의지는 되지 못했다. 만 나이 불과 19~20세. 막막했다. 호기롭게 대항을 택했는데 칼에다 총까지 든 군인들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랐다.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다짐과 실제 죽음의 위기 앞에 선 무게감은 차원이 달랐다.
"장갑차까지 몰고 왔잖아요. 속수무책으로 당했죠. 군인들이 제 정신 같진 않아 보였어요. 술 냄새를 풍기며 '너희들 때문에 종일 훈련만 뛰고 휴가도 못 갔다'면서 욕을 하고,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패고 밟고, 심지어 인근에서 그냥 데이트하던 학생들도 머리에 피를 흘리고 이빨이 깨지고 난리였어요. 그나마 대검으로 찌르진 않더라고요. 저들도 사람이라 그런가. 밀어내는 식이었달까요. 아무튼 굴비 엮듯이 3인 1조로 묶여서 줄줄이 체포됐죠."
전 씨를 비롯한 약 30명의 학생들이 붙잡혀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이세종은 보이질 않았다. 그저 잘 도망갔겠거니, 궁금해 할 틈은 없었다. 총, 칼, 장갑차를 목도한 학생들은 혼비백산이었다. 마침 경찰서를 돌던 한 기자가 학생들에게 "광주가 난리가 났다"고 귀띔을 해주며 웅성거리기 바빴다.
그러던 중 한 경찰관이 학생들 앞에 나타나 소리쳤다. "이세종이 아는 사람 손들어 봐라."
이세종과 같은 농대생인 '병하'라는 친구가 손을 들었다. 경찰에 불려간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유치장에 돌아왔다. 죽은 세종이의 사진을 보고 왔다고 했다. 가슴에 멍 자국이 심했는데 '옥상에서 추락해 숨졌다'는 설명만 들었다고 했다.
이세종 열사의 진짜 사망 원인은 여전히 미궁으로 남아 있다. 단 그의 주검을 검안했던 이동근 전북대병원 교수는 훗날 "두개골 골절과 간장 파열을 확인했다"며 "추락만으로 생길 수는 없는 상처"라고 밝혔다. 계엄군의 집단폭행이 죽음의 원인일 수 있다는 의미다.
전 씨는 45일가량 유치장 수감 생활을 마친 뒤 학교로 돌아왔다. '이세종 사망 사건'은 일파만파 퍼졌다. 그 뒤로 학생들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같이 시위하던 친구들인데도 어느 순간 눈을 피하더라고요. 아는 체도 안 하고. 세종이가 엄청 착했어요. 화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 친구가, 사람이 죽었는데 이게 인간 세상인가 울화통이 터져서 가만히 있질 못하겠는 거예요."
전 씨는 1984년 마지막 한 학기를 앞두고 자퇴했다. 사명감, 죄책감, 책임감, 복수심 등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이대로 졸업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시위를 주도해 약 2000명을 모았다. 자신은 군인과 맞서 할복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끝내 체포됐고 풀려난 뒤에는 학교를 찾지 않았다.
그가 일요신문과 만난 5월 16일 전북대에는 '이세종 열사 추모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작에는 전 씨가 시위대 선두에 서 태극기를 든 사진도 있었다. 그는 사진 속 친구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더니 옅은 웃음을 보였다.
40년 만에 방문한 캠퍼스지만 전 씨 표정은 계속 굳어있었다. '이세종 광장'으로 이름 붙여진 캠퍼스 안 교차로, 이세종 열사가 산화한 자리에 새겨진 표지석, 이세종 열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추모비 등 학교 곳곳에 남아 있는 친구의 흔적 앞에서 어두운 기색이 역력했다.
"세종이가 본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의미로 새겨진 흔적들이 아니잖아요. 승리의 기념비가 아니에요. 희생의 상징…. 만감이 교차하네요. 요즘 청년들은 취업이 힘들다고 먹고 살 걱정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는데, 세종이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볼까요. 저와 남은 친구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 거예요. 세종아! 미안하다."
특히 추모비를 바라보자 마음이 더 산란해졌다. 이세종 열사가 세상을 떠나고 5년 뒤 김준길, 정승룡, 신현섭 등 후배들이 교정에 처음 세웠는데 그마저도 우여곡절이 심했다. 경찰 등의 탄압으로 김제 선산에 옮겨졌다가 007 작전하듯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상황이 반복됐다. 학교에서도 오랜 기간 그늘져 습한 구석에 위치했다. 이세종 열사가 국가유공자가 되고 2000년대 들어서야 캠퍼스 중앙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졌다.
비석에는 이세종 열사의 학우 김성숙 씨가 짓고, 고 신영복 선생이 쓴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란 글귀가 적혀있다. 만약 이세종 열사가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본다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이를 고민하다 나온 문구라고 한다. 전 씨는 청년들에도 말을 남겼다.
"원대한 꿈을 품으십시오. 비록 세종이는 희생의 비석을 세웠지만, 여러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승리의 기념비 세우고 뜻을 아로새기십시오. 각박한 삶이라지만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상을 추구하고 삶을 바꾸는 데에 가장 기본이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전 씨는 약 1시간가량의 인터뷰를 마친 뒤 무심한 듯한 말투로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를 건넸다.
약 5분쯤 지났을까. 멀찍이 이세종 열사 추모비 곁을 맴도는 전 씨 모습이 기자 눈에 들어왔다. 비석을 마주하고 어루만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바로 옆 학생회관은 옛 농성장으로 활용된 때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다. 전 씨는 그곳도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날 인터뷰에는 신인철 전북희망나눔재단 복지사업부장(33)도 함께했다. 그는 5월 17일 전북대에서 열린 이세종 열사 추모식에서 추도사 연사로도 나섰다. 매년 열리는 행사지만 청년이 추도사에 나서기는 올해가 처음이다.
신 씨는 "재학생 때도 추모식에 참석해 헌화를 한 적이 있다"며 "과연 저는 나를 희생해가며 가치와 신념을 지킬 수 있을지 며칠을 고뇌하곤 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여전히 답을 내리진 못한 상태"라면서도 "다만 이세종 열사와 선배들의 피와 땀으로 지금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음을 느낀다면 매일 하루를 뜻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를 바라보는 시선은 전 씨와는 달랐다. 그에게 추모비는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후배들 곁으로 돌아온 이세종 선배 자체이기 때문이다. 신 씨는 "최근까지도 학교와 학생회가 추모비 일대를 재정비하면서 이제는 학생들이 누워서 쉴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며 "전희남 선배님의 말씀과 달리 어쩌면 이세종 열사는 밝고 편안한 후배들을 지켜보며 미소 짓고 계실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이세종 열사에 하고 싶은 말도 전 씨와 다르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전주=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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