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동조합 설립엔 많은 직원의 의지가 반영됐다. 옥 위원장은 지난 5월 15~22일 진행된 노사협의회 근로자 대표 선거에 출마하면서 노동조합 설립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옥 위원장은 세 명의 후보자 중 약 51%로 과반 득표를 하며 근로자 대표로 당선됐다. 투표율도 약 67%로 높은 편이었다. 이전까지 노사협의회 선거 투표율은 50%대로 알려졌다.
투표 결과를 고려하면 삼성물산 건설부문 노동조합엔 1000명 이상의 조합원이 가입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삼성물산 건설부문 직원은 7057명이었다. 이 중 부서장과 인사담당자 등을 제외하면 옥 위원장에게 투표한 직원은 약 2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옥 위원장은 5월 29일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직원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며 "직원으로서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선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또 옥 위원장은 "노동조합이 언제 설립되는지 묻는 글이 익명 게시판에 계속 올라온다"며 "그만큼 직원들의 기대가 크다"고 강조했다.
이번 노동조합 설립으로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복수노조 사업장이 됐다. 기존엔 건설부문 외에도 리조트부문과 패션부문, 상사부문을 아우르는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삼성지회가 유일한 노조였다. 금속노조 삼성지회는 설립 11년 만인 2022년 4월 삼성물산과 최초로 단체협약을 체결한 곳. 향후 두 노조가 어떤 형태로 사측과 단체교섭을 할지는 미지수다. 공동교섭에 나설 수도 있지만, 교섭 단위 분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삼성그룹 계열사 중 복수노조가 들어선 삼성디스플레이에선 2노조로 출발했던 열린노동조합이 조합원 수에서 1노조였던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을 앞선 뒤 2022년 12월 교섭대표노조가 됐다. 삼성화재에선 두 노조가 단체교섭권을 두고 법정공방까지 벌였다.
옥 위원장은 조합원 모집을 위해 만든 네이버 카페 게시글에서 "여러 방법을 강구하여 사측과의 교섭을 준비하겠다"며 "조합 집행부를 모집 중이다. 여러분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조합이 우리 회사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밝혔다. 이어 "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에도 한 발짝 내딛는 그 용기를 기다리겠다"고 덧붙였다.
현재 삼성물산 건설부문 노동조합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를 두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옥 위원장은 "개인적으론 상급단체 가입을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조합의 주인은 위원장이 아닌 조합원이다. 향후 상급단체 가입 여부는 조합원들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화재 등 삼성그룹 다른 계열사에도 복수노조가 있다. 그럼에도 삼성물산에 들어선 복수노조는 상징성이 더 크다. 삼성물산은 과거 삼성그룹의 조직적인 노조 와해 공작으로 논란을 빚은 곳이기 때문이다. 삼성물산은 삼성그룹 지주사 격인 회사이기도 하다.
2011년 삼성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금속노조 삼성지회는 '무노조 경영'을 해온 삼성그룹에 어용노조를 제외한 첫 노조라는 평가를 받았다. 설립 신고 당시 조합원은 삼성에버랜드(현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직원 4명이었다. 삼성노동조합은 2013년 1월 금속노조에 가입해 삼성지회로 편재됐다.
삼성노동조합은 설립 직후부터 끊임없이 사측의 핍박을 받았다. 창립총회 이틀 만인 2011년 7월 14일 삼성에버랜드는 노조 설립을 주도한 조장희 부위원장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이로부터 나흘 후인 2011년 7월 18일엔 조 부위원장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임직원 개인 신상정보 등을 외부로 유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조 부위원장은 부당해고 취소 소송을 냈다. 2016년 12월 대법원 판결로 조 부위원장 승소는 확정됐다. 법원은 "삼성은 노조를 소멸시키기 위해 조 부위원장을 해고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또 삼성에버랜드는 노조 조합원들이 에버랜드 직원 기숙사 앞에서 직원들에게 노조 유인물을 나눠준 것이 주거침입 행위라며 고소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조합원 3명을 각 벌금 50만 원으로 2012년 3월 약식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2013년 2월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2심과 대법원도 원심을 유지했다.
삼성에버랜드는 삼성노동조합 설립 직전 어용노조와 단체협약을 맺어 '알 박기' 논란을 빚기도 했다. 금속노조 삼성지회가 제기한 노동조합 설립 무효 확인 소송에서 법원은 2021년 8월 "비노조 경영 방침을 유지하기 위해 향후 자생적 노조가 설립될 경우 그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사용자 측의 전적인 계획과 주도하에 설립됐다"며 어용노조 의혹을 인정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2013년 10월 공개한 '2012년 S그룹 노사전략' 문건으로 삼성그룹의 조직적인 노조 탄압 방법이 세상에 공개되기도 했다. 150여 쪽에 달하는 문건엔 "노조 설립 상황이 발생하면 각사 인사부서와 협조 체제를 구축해 조기에 와해시켜 달라" "조기 와해가 안 될 경우 장기 전략을 통해 고사시켜야 한다" 등 지침이 적혀 있었다.
결국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폐지했다. 2020년 5월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문에서 "그동안 삼성의 노조 문제로 인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이제 더 이상 삼성에서는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노사관계 법령을 철저히 준수하고 노동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다"며 "노사의 화합과 상생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무노조 경영 폐지' 후 삼성그룹에 부는 노동조합 바람
삼성그룹의 '무노조 경영' 폐지 후 여러 계열사에서 연이어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을 상급단체로 둔 노조 외에도 상급단체 없이 젊은 조합원이 주축이 된 일명 'MZ노조'도 설립됐다.
계열사 노조 간 협력도 이뤄지고 있다. 삼성 전자계열사 노조 연대는 지난 2월 2일 출범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조 연대엔 전국삼성전자노조, 삼성전자노조 동행, 삼성전자사무직노조, 삼성디스플레이 열린노조, 삼성디스플레이노조,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통합지회, 삼성전자판매지회, 금속노조 삼성SDI지회(천안), 삼성SDI울산지회 등 삼성 전자계열사 소속 노동조합 9곳이 참여했다. 이들은 "우리 노조들은 헌법이 보장한 단체교섭을 진행하고 있지만, 회사는 여전히 교섭 해태를 일삼고 있다"며 "상급단체와 조직형태는 다를지언정 앞으로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고 밝혔다.
올해 단체협약을 체결한 노조도 있다. 삼성엔지니어링 노사는 6월 1일 기본급 2.1% 인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협약 체결식을 가졌다. 삼성엔지니어링 노동조합 엔유(&U)는 2021년 6월 설립돼 2022년 10월 사상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한 곳. 삼성디스플레이 노사는 지난 5월 15일 평균 임금 인상률 4.1%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협약 체결식을 가졌다. 삼성디스플레이 열린노조는 2022년 6월 설립돼 2022년 12월 교섭대표노조가 됐다.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선 회사 설립 12년 만인 최근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상급단체 없이 5월 설립된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생노동조합은 30대 직원이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생노동조합은 잦은 인사이동과 불투명한 기준의 성과급 책정 등에 목소리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남경식 기자 ng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