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인제산촌민속박물관 |
남산골 선비 딸깍발이가, 날씨가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은 이유가 있다. 생계에 신경을 쓰지 않아 가난했고, 가죽신을 살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글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청렴과 지조를 신조로 살았다. 조선시대에 왕을 계승하는데도 명나라와 청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이 샌님의 혼(魂) 덕택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 사육신도 이 샌님의 부류요, 삼학사(三學士)도 ‘딸깍발이’의 전형인 것이다. (중략)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義氣)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선조들이 언제부터 나막신을 신었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막신 모양의 신이 나타난다. 조선 전기 회화에도 일본의 게다처럼 울타리가 없는 나막신이 보인다. 하지만 정확한 기록도 유물도 없다.
나막신은 ‘나무신’이 와전됐다. 조선 후기부터 나막신으로 불렸고, 그 전에는 목혜(木鞋), 목극(木屐)이라고 했다. 지방에 따라 이름이 다양해 민중과 함께 한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나막개 나모께 나무신 목신 남신 나막개짝 토막신 껏두기 미엉 남박신 등으로 불린다.
나막신은 비 오는 날이나 땅이 질척거릴 때 신었다. 활동적이지 못해 먼 길을 떠날 때는 사용하지 않았다. 나막신은 굽이 높다. 어떤 나막신은 굽의 높이가 7.5㎝에 달해 요즘의 킬힐(kill heel)을 연상케 한다. 유교문화 때문에 젊은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지 못했다.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을 버릇없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선조들의 나막신 사랑은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지인이 아내를 잃자 위로 편지를 보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슬픔을 삭이는 데는, 종려나무 삿갓을 쓰고, 오동나무 나막신을 신고 산색을 보고 강물소리를 들으며 방랑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한번 시험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추사의 편지에 나타난 것처럼 나막신은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다. 보통은 소나무·오리나무로 만들었다. 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다. 남자용은 더 투박했고, 여자용은 측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그리거나 코를 맵시 있게 팠다.
나막신은 1910년대까지 널리 신었다. 하지만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차츰 밀려났고, 1940년대를 전후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600여 년 전부터 나막신을 신었다. 해수면보다 땅이 낮아 항상 질척거렸기 때문이다. 요즘에도 농사를 짓거나 젖은 땅에서 일할 때는 나막신을 신는다. 현대식 신발의 공격을 받고도 전통 신을 계승 발전시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 관광상품 클롬펀(Klompen)을 만들었다. 안전한 신발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으며 매년 300만 켤레를 생산한다.
나막신의 장점은 또 있다. 발을 보호하면서 일해야 할 때 나막신은 최적이다. 날카롭고 뾰족한 물건으로부터 발을 보호한다. 발의 건강을 위해 일부러 나막신을 신는 경우도 있다. 나막신은 탭댄스에 사용되는 신발의 원조이기도 하다.
나막신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계승해 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딸깍발이의 혼이 깃들어 있는 우리 나막신도 세계인들의 패션 아이콘으로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