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후 발랄한 발걸음, 사이코패스 검사 정상인 범주 벗어나…일류대 나온 피해자 신분 탈취 노렸을 수도
범죄자 신상공개가 이뤄지면 지인들이 범죄자의 평소 모습 등에 대해 글을 올리거나 언론 등에 인터뷰를 하는 일이 많은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정유정 동창과 동창 친구의 글이 화제가 되긴 했지만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데다 자세한 내용도 없다. 지인들도 잘 모르던 사람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웃 주민들도 정유정이 이웃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그만큼 주위에서도 잘 모르는 ‘은둔형 외톨이’였다.
그렇지만 범행 전후 행보는 매우 독특하다. 일반인들과는 물론이고 기존 강력범죄자들과도 전혀 다른 행보를 거듭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유정, 과연 그는 누구인가.
#‘내성적이고 착한 애’와 ‘사이코패스’ 사이
부산경찰청이 정유정을 상대로 실시한 사이코패스 진단 검사 결과가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코패스 진단 검사는 모두 20개 문항으로 40점 만점이다. 일반인의 경우 15점 안팎의 점수가 나오고 사이코패스는 이런 정상인의 범주보다 높은 점수가 나온다. 미국에서는 30점 이상, 한국에서는 25점 이상을 사이코패스로 간주하고 있다. 정확한 점수가 알려지지 않아 사이코패스로 간주되는 점수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최소한 정상인의 범주(15점 안팎)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실 사이코패스일 것이라 추정되던 강력범죄자가 사이코패스 진단 검사 결과 정상인 범주로 나온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의 오원춘과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 사건’의 김길태 등이다. 그만큼 사이코패스 진단 검사 결과에서 사이코패스로 간주되는 점수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범행 전 정유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이웃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정유정을 “그 집에 손녀가 있는 것은 아는데 대화를 안 하니 잘 모른다” 내지는 “얌전하다, 착하다 그렇게만 지금까지 봐왔다” 정도의 말만 했다. 이웃으로만 알고 있을 뿐 그를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분위기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정유정과 고교 동창이라고 밝힌 이가 쓴 글이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정유정의 연락처도 가지고 있고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는데 그때도 사람들과 정말 못 어울렸고 이상했다. 엄청 내성적이고 목소리가 작아서 착한 애인 줄 알았는데 진짜 충격적”이라며 “저도 내성적이어서 내성적인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학기 초반엔 정유정과 계속 같이 다니면서 얘기도 꽤 했었는데 기묘하다. 악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망상에 사로잡혀서 살인이라니 참…”이라고만 밝혔다.
또 다른 이는 자신의 친구가 정유정 동창이이라며 댓글을 남겼는데 그는 “정유정이 옆 동네에 같은 나이라 안 그래도 섬뜩했는데 친구가 동창이었다며 졸업사진을 보여줬다”며 “학교 다닐 때 존재감이 없었나 보다. 다른 친구들이 알려줘서 알았다더라”고 밝혔다.
물론 두 글 모두 진위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유정이 매우 내성적이고 주위와 잘 어울리지 못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근거는 정유정의 휴대폰이다. 경찰이 확인한 정유정의 휴대폰에는 통화 내역이나 친구 연락처 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휴대폰은 누구에게나 필수품이며 휴대폰만 봐도 평소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수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품이 된다. 그런데 경찰도 놀랄 정도로 정유정의 휴대폰에는 주위와의 교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정유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동안 할아버지와 지내며 외부와 교류를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휴대폰이 이를 입증해준 셈이다. 전형적인 ‘은둔형 외톨이’로 보이는 대목이다.
#밝고 가벼운 발걸음…태연한 살인범의 모습
‘은둔형 외톨이’에서 충격적인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된 정유정은 현재 유치장에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유치장에서 별다른 흔들림 없이 지내고 있다고 알려지면서 그 부분도 눈길을 끈다. 대개 충격적인 살인범 등 강력 범죄자들도 피의자 신분으로 유치장에 수감되면 매우 불안한 태도와 행동을 보이지만 정유정은 그런 모습이 거의 포착되지 않았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다시 말해 너무 평범해서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하루 세 번 식사를 다 챙겨 먹었고 잠도 잘 자며 지내는 등 매우 태연한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정유정은 살인 행각 직후에도 이런 평온함을 유지했다. 살인을 저지른 직후 자신의 집으로 가서 여행용 가방을 챙겨 다시 피해자의 집으로 가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이 공개됐는데 그 모습은 전혀 방금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으로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이 눈길을 끄는데 속도도 상당히 빠르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당시 CCTV 영상을 접한 시민들은 정유정의 발걸음이 즐거워 보이는 수준을 뛰어 넘어 경쾌해 보일 정도라는 반응을 보였다. 지금껏 세간에 화제가 됐던 살인범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YTN 뉴스라이더에 출연해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이기 때문에 굉장히 일반적이지 않은 밝은 모습”이라며 “범죄자도 누군가를 죽이면 ‘이를 어떻게 하나’ 하면서 당황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데 저 모습은 그런 공포나 당황스러운 모습이 들어 있지 않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 교수는 “단순한 사이코패스하고는 약간 다르다”면서 “경계성 성격장애라는 게 있는데 어떤 성격장애적 요인을 보이는 게 아닌가라는 추정을 하게 만드는 굉장히 독특한 장면”이라고 분석했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자아상, 대인관계, 정서 등이 불안정하고 충동적인 특징을 갖는 성격장애다.
#살인 준비는 충실, 이후 행보는 허술
검거 직후 정유정은 거짓말만 거듭하며 살해 사실을 부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거짓 진술은 닷새가량 이어졌다. 5월 27일 새벽 긴급체포됐을 당시에도 심한 복통을 호소해 병원 응급실로 갔지만 꾀병으로 드러났을 정도다. 이에 경찰은 치밀한 조사 증거를 제시하며 압박했고 가족도 설득에 나섰다. 그럼에도 정유정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고, 나에게 시신 유기를 시켰다”고 거짓 진술을 했으며 나중에는 “피해자와 다투다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살인 자체는 인정한 진술이지만 이 역시 거짓이었다.
기본적으로 경찰이 CCTV 등을 중심으로 피해자 주위를 살펴본 결과 정유정 외에는 이번 사건에 연루됐을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정유정은 학부모 행세를 하며 과외 앱에서 피해자를 물색해 교복까지 구해 입고 직접 피해자의 집을 찾아갔다.
휴대폰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휴대폰에 통화 내역이나 친구 연락처 등은 전혀 없었지만 2023년 2월부터 ‘살인’ ‘살인 사건’ ‘시신 없는 살인’ 등의 단어를 집중 검색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또한 평소 방송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범죄수사 프로그램을 많이 봤으며 지역 도서관에서 범죄 관련 소설도 빌린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5월 31일 정유정은 “살인해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범행을 자백했다.
경찰은 정유정이 서둘러 증거인멸을 하려고 시신 일부만 먼저 훼손해 유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유정은 경찰 조사에서 “시신을 훼손하다 힘에 부쳐 중단했다”며 “훼손하지 못한 시신 일부는 피해자 집에 두고 왔다”고 진술했는데 이미 경찰은 피해자 자택에서 훼손된 시신 일부를 발견한 상황이었다.
정유정은 석 달가량 충실히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했지만 범행 자체나 그 이후 행보는 매우 허술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살인 이후 여러 증거를 흘리는 점 등을 비춰봤을 때 자신의 환상을 한 번 실행해 본 정도”라며 정유정의 범행 수준을 ‘정교하지 않은 얼치기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정유정은 살인 직후 피해자 옷으로 갈아입고 피해자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경찰은 본인이 입고 간 교복에 범행 흔적이 남아 피해자의 집에 있던 피해자 옷으로 갈아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프로파일러인 배상훈 우석대 경찰학과 교수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사람을 해쳐보고 싶다는 욕망에만 매몰된 나머지 살인 이후 ‘다음 단계’를 떠올릴 수 없는 상태였던 걸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피해자 신분 탈취하려 했나…모호한 살인동기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놨다. YTN 뉴스라이브 인터뷰에서 이웅혁 교수는 “상당 기간 범죄물에 탐닉을 했고 범죄소설에 열중한 것을 보게 된다면 접근했을 때 착용했던 옷과 그 다음에 범행 종료 후 그 집을 나갔을 때 옷을 이른바 변복을 하는 것 정도의 정보는 사실상 사전에 익혀서 실행에 옮긴 것 같다”면서 “살인에 많은 집착을 갖고 있는, 대표적으로 연쇄살인범의 경우 피해자의 소지품이나 신분증을 범행 현장에서 갖고 나온다. 피해자의 소지물 또는 신분증을 옆에 계속 둠으로써 그때의 기쁨, 느낌을 지속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유정은 피해자의 신분증이 든 지갑과 휴대전화 등을 피해자의 집에서 가지고 나왔다.
또 다른 해석은 살해 동기와 연결되는 데 바로 ‘피해자 신분 탈취’다. 이수정 교수는 YTN라디오 ‘신율의 뉴스 정면승부’에서 “정유정이 피해자의 휴대전화나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검거되지 않았으면 피해자인 양 일정 부분 그 집에서 생활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특히 평소 동경하던 대상을 찾아 살해한 부분에 주목했다. 이 교수는 “피해자는 영어 선생님, 그것도 일류 대학을 나온 영어 선생님”이라며 “어쩌면 자기가 되고 싶었던 모습일 수도 있기에 동경의 대상을 피해자로 선택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평소 자기가 가장 열등감이 있던, 자존감이 결핍되어 있던 걸 충족시키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타입을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수정 교수는 YTN ‘뉴스라이더’에서 “아마 본인이 ‘영어를 못하는 것 때문에 사회생활을 못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과외 애플리케이션에서 피해자가 아주 유능한, 일류대 나온 영어 선생님이니까 목표로 삼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본인의 결핍 내지는 핸디캡 극복을 위해 피해자의 신분을 훔치려 했다는 주장이다.
이 의견들은 아직까지는 하나의 전문가 분석일 뿐이고 경찰 역시 살인 동기에 대해 계속 수사 중이다. 다만 정유정이 범행 직전 한 영화를 보고 범행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고 알려진 부분이 눈길을 끈다. 이 영화는 여자 주인공이 한 여성을 살해한 뒤 피해자의 신분을 도용해 살아가는 내용이다.
전동선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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