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열사 추모식은 매년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동산에서 열린다. 이 자리엔 많은 운동권 인사들이 참석한다. 이들은 추모식을 마친 뒤 삼삼오오 모여 ‘훼드라’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은 서슬 시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학생들을 지켜주던 쉼터이자 아지트였다. 이한열 열사가 찾던 식당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요신문이 6월 민주항쟁과 훼드라, 이한열 열사의 인연을 조명했다.
#그때 그 시절 훼드라
훼드라는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5길 32에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영되고 있다. 조현숙 씨는 29세에 남편 김두봉 씨와 함께 목포에서 상경했고, 1973년 훼드라를 인수했다고 한다. 원래 카페였으나, 연세대 학생들의 등쌀에 못 이겨 소주와 막걸리를 파는 주점으로 바뀌게 됐다고 한다. 당시 계란말이와 김치찌개, 두부 두루치기, 콩나물 해장라면이 대표 메뉴였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여사님이 가게를 원래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며 “가족 중 한 분이 덜컥 계약부터 했으나 사정상 못 하게 됐다. 보증금을 안 날리려고 여사님이 임시로 맡으셨다가 몇십 년을 운영하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훼드라는 1970년대 말부터 운동권 전용 술집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연세대 동아리 인간문제연구회가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다른 동아리 학생들도 드나들었다. 처음 훼드라를 찾은 학생이 윤후덕 민주당 의원이다. 시위하고 최루탄 범벅이 된 학생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면 매운 기운이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손님은 아예 얼씬도 하지 않게 됐다. 그렇게 훼드라는 학생들의 치열한 토론장이자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현장이 됐다. 군부 독재 정권의 삼엄한 감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했다.
조현숙 씨는 학생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 후원자이자 동지로 활동하게 됐다. 조 씨는 가게를 닫을 때 문을 잠근 적이 없다. 솥에는 쌀을 안쳐 놓았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지명수배자가 된 학생들이 밤에 몰래 들어와 밥을 먹고 가라고 한 배려였다. 어느 날엔 1~2평 정도 되는 방에서 7~8명이 자고 있었다고 한다. 조 씨는 학생들 재판 때마다 만사를 제치고 남편과 함께 방청하러 다녔다. 우상호 의원의 말이다.
“여사님은 숙명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평범하고 순수한 가정주부셨다. 평소 시국에 관심이 많으셨던 분이 아니다. 훼드라에서 자연스럽게 학생들 애환을 듣게 됐다. 솜털 보송보송한 애들이 미래를 다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다 수배됐다고 하니까, 그럴 가치가 있냐며 신세 망쳤다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런데 재판장에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고 하셨다. 학생들이 훼드라에 가방을 두고 시위하러 나갔는데, 구속돼서 못 돌아올 때가 있다. 사장님은 그 학생 어디 있는지 수소문하셨다. 서대문구치소 찾아가서 영치금 넣어주시고, 재판 방청에 오셔서 매번 눈물을 흘리셨다.”
1983년 조현숙 씨는 치안본부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당시 연세대 민민투(반제 반파쇼 민족 민주 투쟁위원회) 위원장 앞으론 300만 원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려있었다. 그 위원장은 추석 인사로 조 씨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오전 11시쯤 조 씨는 수사관 2명에 의해서 치안본부로 강제 연행됐다. 수사관들은 위원장 은신처와 훼드라에 자주 오는 학생들 이름, 연락처를 캐물었다. 조 씨는 손님 신상정보를 알고 술을 파느냐며 따졌다. 수사관들이 몇 명만 대라고 계속 요구하자, 조 씨는 감옥에 있는 학생들 이름만 불러주고는 그날 오후 5시쯤 귀가했다. 조 씨는 집 전화기가 도청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고 한다.
전두환 씨 둘째아들 재용 씨도 훼드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식지 ‘희망세상’ 2009년 3월호에 실린 ‘그 시절의 훼드라! 우린 죽어도 좋았다’에 따르면 조현숙 씨는 “재용이가 친구 두 명과 같이 왔어요. 경호원들은 밖에 서 있고. 조용히 막걸리를 시켜 마시고 있는데. 정외과 학생인가, 한 친구가 다가가더니 전두환을 막 비판하며 들어보라고 하더군요. 전재용은 가만히 있고 그렇다고 경호원들이 저지하지도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재용 씨는 1983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고 1985년 미국 조지타운대에 편입했다고 알려졌다.
#이한열 열사와 훼드라
훼드라는 이한열 열사와도 인연이 깊다. 조현숙 씨는 김학민 전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과의 인터뷰에서 “이한열이는 언제나 술 취하기 전에 자리를 끝까지 책임지고 뒷정리를 잘했어요. 마무리가 아주 반듯해 ‘정리맨’이라고 했다”며 “만화사랑 친구들과 자주 왔는데, 만화사랑 회장은 술이 아주 과했어요. 한열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여기가 본부였어요. 세브란스에서 보초 서는 학생들 먹으라고 빵도 사서 보냈어요. 한열이 장례날 신촌 로터리 노제 지낼 때 음식도 훼드라에서 했어요. 그 후 언젠가 우상호 씨가 한열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었어요”라고 말했다.
2005년 6월 조현숙 씨는 ‘이한열 기념관’ 개관식에도 참석했다. 이한열 기념관은 민주 열사로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기념관이다. 국민 모금으로 지어졌다. 조 씨도 모금에 참여했고, 벽돌에 ‘민주화에 길이 남길. 조현숙 훼드라’라는 서명을 남기기도 했다.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조현숙 씨에게 6월 항쟁은 남다른 의미로 존재했다. 우상호 의원은 “사장님께서 6월 항쟁을 보며 흥분됐다고 하셨다. 학생들이 시위하고 잡혀가지 않고 승리를 하니까. 이기는 투쟁도 있다고 생각하셨다”며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다른 애들한테는 이름으로 부르시는데, 저한테만 존칭 하신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6월 항쟁 성공시킨 학생회장이라 씨를 붙여 부른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조현숙 씨는 매년 6월 9일 장을 봐서 음식을 했다. 운동권 인사들이 이한열 열사 추모식을 마친 뒤 훼드라에 다 같이 모여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연세대 출신은 아니지만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 이인영 민주당 의원,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도 훼드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우상호 의원은 “여사님께서 2010년 별세하신 뒤에도 훼드라를 찾는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신촌에 이한열 열사가 갔던 선술집이 훼드라밖에 남지 않았다. 인테리어도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있다. 벌써 올해로 36년째”라며 “훼드라를 드나들던 애들이 검판사, 국회의원, 기업인 등 사회 지도층이 됐다며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고 말했다.
조현숙 씨의 보물 1호는 외상장부라고 한다. 우상호 의원은 “생전에 여사님께서 송영길 전 대표한테 외상값 좀 갚으라고 채근하셨다. 진짜 외상값이 있어서 갚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하는 낙으로 지내신 것”이라며 “명단에 적힌 학생들이 인생에서 큰 추억이고 자부심이라고 하셨다. 그들이 훼드라에 찾아오는 것을 그리워하셨다”고 말했다. 이 외상장부는 신촌에 홍수가 나던 날 유실됐다.
2010년 12월 17일 조현숙 씨가 향년 7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조문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측에서도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약 150명이 옆 빈소와 장례식장 측 동의를 구한 뒤 추모 전야제를 진행했다고 한다.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 민주화 운동 당시 불렀던 민중가요를 4~5곡 합창했다.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이 엉엉 울었다고 한다. 조 씨 외동딸은 어릴 적부터 대학생 언니 오빠들을 따라 그런 노래를 부르며 컸다.
우상호 의원은 “외상장부는 잃어버리셨지만, 운동권 인사들이 여사님을 잊지 않았다”며 “대학교 앞에서 술집 운영하셨던 분 중에서 150명이 추모식 해드린 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웬만한 사람은 다 왔고, 국회의원만 7~8명이 왔다. 내가 죽어도 그렇게는 안 올 것 같다”고 농담을 건넸다.
옆집 편의점 사장이 명맥 이어
훼드라가 50년 넘게 신촌에서 살아남은 비화도 흥미롭다. 1990년대 들어 훼드라의 가게 운영은 어려워졌다고 한다. 젊은 대학생들이 잘 찾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 1992년 그레이스백화점(현 현대백화점)이 생겼고, 이곳의 직원들이 훼드라를 방문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 임대료도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던 건물주가 연세대 67학번이었는데, 그는 학교 후배들이 훼드라에 들러 술 마시고 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제일 큰 위기는 조현숙 씨가 작고한 해였다. 조 씨가 작고하기 직전인 2010년 12월 10일 가게는 이미 폐업 신고를 했다. 조 씨 장례식이 진행되던 중 손 아무개 씨가 훼드라 인수에 나섰다. 그는 2006~2007년부터 훼드라 옆에서 편의점을 운영한 인물이었다.
손 씨는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판검사, 국회의원, 의사, 영화감독 등이 훼드라를 찾았다”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인수해도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훼드라는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도 가게 문을 닫지 않았지만 1957년생인 손 씨가 운영에서 손을 뗀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실제 운동권 학생들이 자주 갔던 △서울대앞 ‘녹두’ △고려대앞 ‘이모집’ △이화여대앞 ‘목마름’ 등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