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경 사퇴 후 김은경 임명, 당내 복잡한 구도 속 ‘무용론’ 고개…친명계 “절 싫으면 중이 나가라”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이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됐다가 9시간 만에 물러난 후 비명 진영은 이재명 대표를 향한 원성을 쏟아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첫 번째는 인사 과정이다. 임명 발표 직전까지 ‘이래경 혁신위원장’을 알고 있었던 당내 인사는 극히 소수였다. 일부 최고위원들은 “이래경이 누구냐”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밀실 인사’라는 지적이 제기됐고, 일각에선 이 대표 비선 논란이 거론되기도 했다.
두 번째는 혁신위의 진정성 논란이었다. 이래경 이사장이 친명 성향을 보여 왔다는 점이 거론되며 새롭게 꾸려질 혁신기구가 과연 당의 쇄신을 주도할 수 있을지 의문부호가 붙었다. 비명계에선 개인 사법 리스크, 전당대회 돈봉투 논란, 김남국 암호화폐(가상화폐) 투자 등으로 인해 사면초가에 놓인 이 대표가 영향력 유지 수단의 일환으로 혁신위를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민주당이 6월 15일 김은경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혁신위원장으로 발표하기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 대표를 포함한 지도부는 ‘이래경 사태’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폭넓게 여론을 청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검증 과정도 보다 엄격히 진행했다고 한다. 이래경 사의 후 김 교수 인선까지 10일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김은경 교수는 2015년 문재인 대표 시절 당무감사위원을 맡았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엔 여성 최초 금융감독원 부원장으로 발탁됐다. 이를 근거로 김 교수를 친문계 인사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당 안팎에선 ‘원칙주의자’라는 평이 주를 이룬다.
김 교수와 함께 혁신위원장 최종 후보 3인에 올랐던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은 비명계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정근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친명계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가 김 교수를 최종 낙점한 것은 계파색이 가장 옅기 때문이라는 반응이다. 실제 김 교수는 친문뿐 아니라 다양한 계파 의원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혁신위원장 인선이 끝났지만 비명계에 퍼져 있는 ‘혁신위 무용론’은 오히려 더욱 분출하는 모습이다. 여기엔 비명계가 밀었던 ‘김태일 카드’가 무산된 부분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긴 하다. 동시에 김 교수가 과연 얽히고설켜 있는 당내 복잡한 상황을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도 작용하고 있다. 한 비명계 중진 의원은 김 교수 임명 발표 직후 나눈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계파들이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재명 대표조차 코너에 몰려 있다. 정치 9단들이 와도 해법을 찾기는커녕 수습조차 하기 힘든 소용돌이 구조다. 대의원제 폐지와 같은 민감한 문제를 혁신위가 건드릴 수나 있겠나. 또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이 다시 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도 궁금하다. 전권을 받는다고 한들, 제대로 행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혁신위가 ‘이재명 거수기’로 전락할 수 있을 것으로 우려한다.”
비명계가 혁신기구 출범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데엔 6월 12일 윤관석 이성만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과도 관련이 있다. 검찰은 두 의원에 대해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때 돈봉투를 전달한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12일 체포동의안 표결이 실시됐다. 윤석열 정부 들어 4번째 체포동의안 부결이다. 앞선 부결은 노웅래 의원과 이재명 대표다.
당초 이번엔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됐었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야당 탄압 프레임보단 방탄 국회라는 비판이 더욱 거셌기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체포동의안이 부결되자 민주당 내에선 탄식이 나왔다. 쇄신을 부르짖으며 혁신위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 민주당이 국민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또 다른 비명 의원은 “의원들이 자율투표를 한 건 맞다. 두 의원에 대해 동정여론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있을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과 연결 짓는 시선들도 많다. 이 대표 건을 부결시키려고 이번에도 그랬다는 것이다. 쇄신을 한다고 했으면 이번 체포동의안부터 통과시켰어야 했다”고 말했다.
혁신위 무용론엔 이런 물밑 기류가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더 나아가 비명계 내부에선 결국 비대위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대위는 이재명 대표 사퇴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친명계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시나리오라는 평이다. 하지만 비명계는 물론 정치권에선 이 대표가 꺼내든 혁신위가 실적을 내지 못한다면 비대위 전환 움직임은 빨라질 수도 있다고 본다.
변수는 총선이다. ‘이재명 체제’로 총선 승리가 힘들다는 인식이 퍼진다면 비대위는 상수로 격상할 수 있다. 이 대표가 당내 최대 계파 수장이라고는 하지만 의원들의 지상목표는 총선 승리다. 성공한 비대위라고 평가받는 2012년 ‘박근혜 비대위’와 2016년 ‘김종인 비대위’가 출범할 때 당에는 각각 친이계와 친문계라는 주류계가 있었다. 하지만 총선 위기론이 퍼지자 비대위 전환 목소리가 분출했고, 주류 진영도 백기를 들며 대세에 올라탔다.
비명계의 이런 스탠스에 친명계는 강한 불쾌감을 내비쳤다. 혁신위가 아직 출범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비대위 얘기를 거론하는 것은 ‘이재명 흔들기’를 통해 당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명계가 당의 쇄신을 명분으로 내걸고 있지만 결국은 ‘밥그릇 지키기’라는 의미다. 윤관석 이성만 체포동의안을 놓고도 계파를 떠나 대부분의 의원들이 부결에 표를 던졌는데, 왜 이재명 대표를 언급하는지에 대한 불만도 들린다.
친명계에선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는 요구가 고개를 들었다. 이들은 혁신위의 최우선 과제로 대의원제 폐지를 꼽는다. 비명계가 절대 반대를 외치는 건이다. 친명 한 초선 의원은 6월 15일 “이 대표가 차기 대권 도전을 하려면 이번 공천을 통해 더욱 입지를 다져야 한다. 비명계가 두려워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니겠느냐. 임기 시작부터 당 대표 사퇴를 부르짖는 비명 의원들이야말로 쇄신 대상”이라면서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면 된다”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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