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떤 상실이 가장 아플까. 가치는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상실과 상실을 비교하는 일은 상실을 체험하는 일은 아니다. 자아가 해체되는 경험 끝에서 무상을 깨닫고 무상의 힘으로 힘 빼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겨야 상실이 거듭 태어나는 변화가 될 텐데 거기 객관적인 비교가 들어올 자리는 없다.
요즘 분위기에 맞춰 심리학적으로 접근한 흔적이 농후한 ‘빨강 머리 앤’의 한 테마는 바로 이 상실이다. 모진 세상 속에서도 상상력을 잃지 않는 소녀, 박정한 세상 속에서도 따뜻한 인심을 만나 자유롭게 크는 소녀, 그 앤의 첫사랑은 길버트다.
길버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0대 소년이 유일한 가족인 사랑하던 아버지를 잃었으니 얼마나 힘든 상실일까. 고아 출신 앤은 누구보다도 그 심정을 잘 알고 있다. 장례식이 끝나고 안절부절못하는 길버트를 본 앤은 빛의 속도로 뛰어나가 그와 함께 걷는다. 그리고는 위로의 말은 건넨다.
“훌륭한 장례식이었어, 주위도 순백으로 고요했고. 고아가 되는 건 힘든 일이지만 넌 시작이 좋잖아. 나는 부모님을 전혀 몰랐어. 내가 아기였을 때 돌아가셔서 나는 혼자 꾸려나갈 여력이 없었어.”
그 후에 무심하게 던진 이 한마디가 길버트를 자극한다.
“그래도 너는 운이 좋아.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으니, 나보다 낫잖아.”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맞는 말이 언제나 맞는 말인 건 아니다. 그때 길버트는 이렇게 반응한다.
“내가 운이 좋다고? 왜 너여야 하는데?”
왜 내 삶이 너와 비교되어야 하냐며 훌쩍 가버리는, 싸늘하기만 한 길버트의 반응에 앤은 당황하고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소중한 이를 잃고 상실감에 휩싸여 있는 어린 길버트가 앤의 서툰 위로에서 진실을 보고 대응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왜 너여야 하는데! 그 문장은 마치 나무에 못이 박히는 것처럼 내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삶은 비교될 수 없다. 나와 너는, 너와 그는 시작점이 다르고, 결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다. 당연히 뻗어가는 양식이 다르다.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자매라고 해도 단순 비교될 수 없는 이유다. 그 점에서 모든 삶은 고유하고, 우리를 성장시키는 길은 언제나 ‘길 없는 길’이다. 길 없는 길 위에서만 우리의 삶은 고유해진다.
삶의 이야기가 고유해지는 이유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상실 혹은 상실의 기억이다. 상실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아무도 대신 겪어줄 수 없고 개입할 수도 없는 경험의 영역이다. 상실을 어떻게 겪고 어떻게 받아들이게 됐는지 그 과정은 그 사람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신성한 영역이다.
아버지와 함께한 나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니 길버트에게 아버지와 살았던 집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있는 집이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게 된 농장도 더 이상 정을 붙이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농장이 아니다. 어린 시절 나는 왜 길버트가 앤을 떠났을까, 안타까워하며 길버트의 방랑을 읽었다. 그 장면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집을 떠나 배를 타고 선원이 되어 몸을 힘들게 하는 길버트의 방랑은 상실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고 마음 둘 곳이 없어 보셨는지. 내 속에 내가 사라진 느낌, 껍데기만 남은 느낌. 그 느낌은 버려야 할 비생산적인 느낌이 아니라 그것까지도 사랑인, 존중해야 할 삶의 결이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길버트처럼 방랑하는 일은 상실이 시킨 자연스러운 일이다. 충분히 맥이 빠져야 다시 맥이 돌고, 충분히 존중해야 지나가고, 나비가 된 애벌레처럼 변화를 맞는 것이 아닐는지. 고유한 삶의 고유성을 깨닫게 하는 통과의례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