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은 영원하다는 점에서 특별한 존재였으나, 그 존재들도 인간에게 경배를 받지 못하면 사라져갈 밖에 없었다. 그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원한 신들도 인간의 배신과 망각에 의해 힘이 빠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루브르에는 볼거리, 생각할 거리가 많다. 내 책 <그림너머 그대에게>에도 루브르 그림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루브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직접적인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나리자도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다.
그 그림, 기억할 것이다. 오른 손으로 해골을 만지고 있는 골방 속 막달레나가 작은 촛불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특이한 것은 해골을 만지고 있는 오른 손에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는 점이다. 해골을 만지고 있다는 의식이 아예 없는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촛불이다. 책상 위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를 사랑한 여자 막달레나 마리아가 나와도 그 그림은 불교적이다.
알려졌듯이 막달레나는 열정적으로 예수를 사랑한 여인이다. 교회의 전승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자를 막달레나로 해석한다. 예수를 찾아가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긴 그 여자! 그 여자 막달레나는 열두 제자들에 앞서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보고 처음으로 경험한 제자다.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던 그 순간을 경험한 여자!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충만한 사랑의 힘을 알 것 같지 않은가. 영원하고 바꿔도 아깝지 않은 그 찰나의 경험이 막달레나로 하여금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을 응시하는 내공을 길러준 게 아닐까.
무상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고통이 생긴다. 젊음은 왜 이리 짧고 사랑은 왜 그렇게 빠르게 가냐고 탄식하게 되는 것이다. 무상이 큰 고통이 되는 이유는 욕망과 젊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무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실제로 남방불교에서는 해골을 앞에 두고 관(觀)을 한다. 관(觀)이란 보는 것이다. 보긴 보는 건데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는 것을 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무시무시한 백골을 앞에 두고 관을 할까? 백골이 무서운 것은 백골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백골은 ‘나’의 미래고, 나는 백골의 전생이다.
나는 한 손은 해골 위에 두고, 그리고 눈 가득 촛불을 응시하고 있는 막달레나 마리아를 본다. 내 속에도 그녀가 있는 것 같다. 지나놓고 보면 찰나와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하게 되는 사랑은 하릴없이 짧았으나 그 찰나의 경험이야말로 무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된 자를 축복하고 싶다. 무상을 받아들이고 있어 무상에 시달리지 않는 인생이고 싶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