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그룹은 예브게니 프리고진과 드미트리 우트킨이 창립한 용병기업이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바그너그룹은 꾸준히 러시아와 유착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 중심에 섰다. 군복과 조직도가 러시아군과 비슷해 사실상 ‘러시아군 하청업체’ 지적을 받아왔다. 바그너그룹은 러시아가 국제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분쟁에 참여하는 등 ‘외교 사각지대’에서 전쟁 집단으로 활동해 왔다.
늘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바그너그룹이 2023년 6월 24일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바그너그룹 수장인 프리고진은 텔레그램 음성 메시지를 통해 쿠데타 시작을 알렸다.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 용병들이 러시아 남부 도시 로스토프에 진입했다”면서 “방해가 되는 누구든 파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프리고진은 “이것은 쿠데타가 아니라 정의를 위한 행진”이라고 했다. 바그너그룹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러시아 남부 지역으로 진출했다.
쿠데타 선언에 앞서 프리고진은 러시아 국방부가 바그너그룹 후방 캠프를 미사일로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2000여 명 바그너 용병이 살해됐고, 프리고진이 러시아 군 지도자를 처벌하기 위해 무장반란에 본격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의 투견’이라고 불렸던 프리고진이 푸틴에 극단적 대립각을 세운 셈이다.
바그너그룹은 2022년 2월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러시아 입장에선 ‘대활약 선봉’에 바그너그룹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바그너그룹은 최전선에서 전투를 펼쳤다. 2023년 5월엔 최대 격전지인 도네츠크주 바흐무트를 점령하는 데 바그너그룹이 큰 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전쟁 과정서 용병그룹 수장 프리고진과 러시아 군 수뇌부가 심각한 갈등을 빚어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한 군사 전문가는 “러시아 용병그룹 수장인 프리고진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활약도가 높아지면서 점점 러시아 ‘비선 권력’ 정점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러시아 군 수뇌부 등 실세들이 프리고진을 견제하는 강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일어난 갈등이 무장반란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나타난 셈”이라고 지적했다.
바그너그룹이 무장반란을 일으키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대로했다. 푸틴 대통령은 6월 24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는 등에 칼이 꽂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반역에 직면했다”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 대응은 가혹할 것”이라면서 “국민을 배신하고 군사반란에 가담한 테러리스트들은 모두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군을 상대로 무기를 든 모든 이들은 반역자”라면서 “러시아군은 반역을 모의한 이들을 무력화하도록 필요한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러시아 정부는 바그너그룹 수장 프리고진을 군사반란 혐의로 형사입건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그룹은 러시아 남부 주요 군사거점인 로스토프를 점령한 뒤 모스크바 진격에 돌입했다. 바그너그룹은 모스크바 200마일 근방까지 진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던 러시아 군 수뇌부는 ‘뜻밖의 자중지란’에 심장부가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다. 러시아 군부 입장에선 외부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전선과 별개로 대반란군 전선을 별도로 급조해야 할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 셈이었다.
6월 24일 러시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러시아군과 바그너그룹의 ‘대충돌’이 카운트다운에 돌입하는 듯보였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6월 24일 보고서를 통해 이번 무장반란을 분석했다. ISW는 “프리고진이 이번 반란을 실존적 생존 노력으로 여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러시아 고위 장교들과 군인들의 충성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봤다.
ISW는 “바그너가 러시아 국방부를 확실하게 위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푸틴이 러시아 군을 전복시키려는 프리고진의 성공을 지켜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바라봤다. 다소 출혈이 있더라도 러시아가 바그너그룹 무장반란 진압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명시한 보고서였다.
푸틴과 프리고진 둘 중 하나만 승리하는 치킨게임이 될 것으로 보였던 무장반란은 시작한 지 24시간도 안 돼 극적인 타결을 맞이했다. 미국 CNBC에 따르면 프리고진은 텔레그램을 통해 “크게 피를 흘릴 시점이 다가왔다”면서 “러시아인의 피를 흘리는 데 따르는 책임을 알기 때문에 계획에 따라 부대를 되돌려 야전캠프로 되돌아간다”고 회군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곧이어 로스토프를 점령했던 바그너그룹이 철수했다. 러시아 시민들은 바그너그룹 수뇌부 및 대원들과 사진을 찍으며 그들을 응원하기도 했다. 바그너그룹과 러시아가 대충돌을 앞두고 극적으로 화해한 이면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벨라루스 대통령실은 “양측(러시아군과 바그너그룹)이 러시아 내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면서 “(이번 합의는) 바그너그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라고 했다. 벨라루스 국영 언론에 따르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프리고진을 약 20년 동안 알고 지냈고, 이번 중재에 나섰다”면서 “이번 합의에 따라 프리고진은 벨라루스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프리고진에 대한 법적 조치(형사입건 및 체포령)는 취하될 것”이라면서 “바그너그룹 군인들도 러시아를 위한 복무를 인정받아 어떠한 조치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푸틴 대통령이 ‘가혹한 대응’을 언급한 지 수 시간도 되지 않아 러시아 크렘린궁으로부터 이번 무장반란을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나온 셈이다. 프리고진은 ‘1일천하’ 돌입 이후 빠른 회군 결정으로 생존권을 보장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푸틴 대통령은 갑작스런 용병기업 쿠데타로 정치적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23년 동안 러시아를 철권통치한 푸틴 대통령은 이미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장기화로 그간 쌓아 올린 리더십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6월 24일 자중지란 격으로 러시아 내부서 무장반란이 발생하면서 푸틴 리더십에 대한 의문부호가 더울 부각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무장반란에 대해 프리고진이 쿠데타 성공 확률이 0%에 수렴할 것을 계산한 상황임에도 ‘모스크바 진격’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고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과 다급하게 합의에 도달하고 내전 국면을 극복한 상황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 군사전문가는 “무장반란 시작부터 로스토프 점령, 모스크바 진격, 회군 결정까지 프리고진의 한 수 한 수가 푸틴 대통령 허를 찌른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푸틴 대통령도 내전을 극복할 수는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국제적 시선 등을 고려할 때 두 가지 전쟁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에 굉장한 심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장반란 사태로 푸틴 리더십이 치명상을 입은 형국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직 러시아 공군장교 글렙 이리소프 발언을 인용해 “많은 러시아연방보안국 인사들과 군 정보당국 관계자들이 프리고진을 지지하고 있다”면서 “이는 러시아군 내부 부패와 우크라이나에서 실패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까닭”이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리소프는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난 일부 다른 조직만이 푸틴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란 끝났지만 푸틴 리더십 회복은 미지수
쿠데타는 반란군의 철수로 일단락되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리더십은 큰 상처를 입었다. 푸틴은 ‘차르’라 불릴 만큼 막강한 통제로 2인자의 군림을 용인치 않으며 장기집권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번 쿠데타로 통치의 근간인 ‘통제’가 뒤흔들린 것이어서 권력 유지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에서 푸틴의 러시아 통제력 상실이 입증됐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젤렌스키는 “하루 만에 그들은 도시 여러 개를 잃었다”며 “러시아 도시를 장악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게 얼마나 쉬운지 모두에게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그는 “세계는 러시아의 보스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며 “푸틴이 크렘린에 더 오래 있을수록 더 많은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BBC에 따르면 믹 멀로이 전 미 국방부 차관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위해 용병에 의존해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이번 쿠데타 시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끔찍한 실수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또 영국국방정보국(DI)도 24일 트위터에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 그룹과 러시아 군부의 불화가 노골적인 군사적 대결로 확대됐다”며 “근래 러시아에 대한 가장 중대한 도전”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쿠데타에 대해 “푸틴의 권력 장악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러시아 정부와 군대 내부의 긴장을 보여줬다”며 “사기가 저하된 러시아 군대와 달리 의욕적이고 잘 무장된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고 풀이했다.
뉴욕타임스는 “푸틴과의 개인적 관계로 이익을 얻어 온 프리고진이 러시아를 가장 큰 '정치적 위기'에 빠뜨렸다”며 “푸틴 대통령이 1999년 12월 31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된 이후 이처럼 극적인 도전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고 분석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