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프리고진·쇼이구 오판으로 극단적 해프닝 일어날 뻔…‘사살명령’ ‘욕설통화’ 등 루카셴코 후일담 화제
‘푸틴의 투견’이라 불리며 전장을 누볐던 용병기업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6월 24일 ‘모스크바 진격’을 선언했다. 무장반란의 시작이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큰 공을 세웠던 프리고진이 총부리를 거꾸로 돌리자 ‘러시아 내전 시나리오’가 제기됐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남부 주요 군사거점인 로스토프나도누(로스토프)를 점령한 뒤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 진격을 노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반역자 척결을 선언했다.
하지만 대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6월 24일 새벽(현지시각) 막을 올린 바그너그룹 무장반란은 같은 날 오후 8시 24분 막을 내렸다.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은 회군한 뒤 야전 훈련소로 복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프리고진의 주장대로라면 반란군은 모스크바 200km 지점까지 진격했지만, 돌연 회군하면서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된 것.
무장반란 국면이 종결된 이면에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중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29년 동안 벨라루스를 장기집권해왔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프리고진 측엔 ‘생존 방안’을, 푸틴 대통령 측엔 ‘무장반란 종결 방안’을 각각 내밀었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직전 마지막 골든타임에 프리고진과 푸틴 대통령은 루카셴코 대통령이 제시한 카드를 받아들였다.
한 군사 전문가는 “러시아 당국과 무장반군이 ‘득 없는 대충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루카셴코 대통령이 중재자로 완충 역할을 했다”며 “푸틴 대통령과 상당히 우호적인 외교적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동시에 프리고진과도 20년여 동안 알고 지냈던 루카셴코 대통령이 양쪽에 ‘쇼당’을 외친 형국”이라고 무장반란 종결 국면을 설명했다.
쇼당은 화투놀이 일종인 ‘고스톱’에서 한 사람이 가진 마지막 화투패 두 장이 각각 다른 두 사람에게 점수를 나게 하는 패일 경우, 두 패를 공개하고 어떻게 할지 합의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루카셴코 대통령이 프리고진과 푸틴 대통령 양측과 소통하며 양쪽이 두려워하는 부분을 해소해주면서, 무장반란이 내전으로 확대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6월 24일 프리고진은 러시아 당국과 합의를 완료한 뒤 회군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리고진은 무장반란 국면 종결 이후 행선지로 벨라루스를 선택했다. 프리고진의 벨라루스행은 생존 보장을 위한 반군 철수 핵심조건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크렘린궁에서도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부분에 상호 합의됐음을 암시했다.
6월 25일 프리고진의 행선지가 벨라루스인 사실이 알려진 뒤, 프리고진 행적과 관련해 각종 괴담이 돌기도 했다. 프리고진의 정확한 행적이 오리무중이었던 까닭이다. 합의 이후 프리고진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구금돼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프리고진은 다음날 텔레그램 음성메시지를 통해 “‘정의의 행진(무장반란)’ 목표는 바그너그룹 파괴를 피하는 것이었지 정부 전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무장반란 종결 이후 반란 목적이 러시아 정부 전복이 아니라, 러시아 군부와의 갈등에 따른 조치였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푸틴 대통령을 향해 ‘악의가 없었다’는 점을 재차 시사한 셈이다.
일각에선 이번 무장반란 본질적 원인이 러시아 군부와 용병집단 사이 내부 권력다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 내부에서 군 당국과 용병집단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 기류가 흘렀고, 그 신경전이 격화되면서 무장반란이라는 극단적 해프닝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6월 27일 항공기 추적 전문 웹사이트 ‘플라이트 레이더 24’에서 프리고진 전용기 ‘엠브라에르 레거시 600’이 벨라루스 민스크 주변 공군기지에 착륙했음을 포착했다. 로이터통신은 이 같은 사실을 인용해 “프리고진이 벨라루스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벨라루스 국영방송은 루카셴코 대통령이 “프리고진이 오늘 벨라루스에 도착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CNN과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루카셴코 대통령이 현지 언론에 언급한 ‘무장반란 중재 후일담’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루카셴코 대통령은 자신이 푸틴 대통령을 다독여 프리고진과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주장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상당한 분노를 표출하며 ‘프리고진 사살 명령’을 내렸는데, 루카셴코 대통령은 “푸틴에게 일단 냉정함을 되찾고 지금 상황을 넘기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무장반란 당시 프리고진 상황과 관련해 루카셴코 대통령은 “프리고진은 반쯤 미친 상태였고, 처음 통화할 당시 30분 동안 욕설로만 대화했다”고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회상하며 프리고진과 ‘욕설 통화’ 에피소드를 공개하기도 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무장반란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계기에 대해 “러시아가 붕괴하면 우리는 폐허가 될 것이며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프리고진이 지난 몇 달 동안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갈등을 겪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당국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지난 주말 그 누구도 영웅이 아니었다”며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봤지만, 세 사람(푸틴·프리고진·쇼이구)이 상황을 오판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의 사살 명령, 프리고진의 욕설 통화 등 급박한 상황을 거쳐 무장반란은 결국 ‘극적 합의’로 막을 내린 형국이다. 그러나 국내외 안보 전문가들은 푸틴 대통령이 궁극적으로 프리고진에 대한 보복을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무장반란 수습 과정에서 “(러시아 당국이) 바그너그룹에 지원한 자금 사용처를 조사해 문제가 발견되면 처벌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간 부인해 왔던 러시아 정부와 바그너그룹 연관성을 시인한 모양새가 됐다. 이에 해당 발언은 향후 러시아를 압박할 외교적 리스크로 작용할 우려가 있는 대목으로 꼽힌다. 전직 외교관은 “푸틴의 발언은 실언으로도 볼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 정부와 바그너그룹의 연관관계와 관련해 국제사회 압박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리고진은 일단 생존을 보장받은 상태로 벨라루스에 새 둥지를 틀게 됐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약 90km 떨어진 벨라루스 한 지역에 바그너그룹 신규 기지가 마련될 전망이다. 해당 지역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인접국가와도 멀지 않은 곳이다. 바그너그룹의 이동으로 동유럽을 중심으로 새로운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다.
한 군사 전문가는 “이번 무장반란으로 푸틴 대통령이 큰 위기를 맞는 양상이 전개됐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오히려 바그너그룹이 벨라루스로 전진배치돼 동유럽이 새로운 화약고의 중심축이 될 가능성도 제기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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