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국기 문양의 우산을 쓴 관광객들이 올림픽 링으로 장식된 런던브리지를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런던에서 ‘런더너’를 만난다면 다음 단어들을 언급해보라. 이민자·인도 커리·빅이슈·폭동·지하철 악사 등. 아마 ‘이 사람이 뭔가 좀 아는군’ 하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모두 런던을 깊숙이 상징하고 있다. 올림픽 기간이라 거리마다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런던의 속살은 신사의 반들반들한 얼굴에 가려져 잘 안 보인다.
# 떠나고 싶지 않은 런던
지난 7월 19일 낮 3시께, 스리랑카 출신의 이민자 비묵티(가명·26)는 런던 번화가 피커딜리서커스 내 한 관광 상점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종업원인 비묵티는 억양이 낯선 영어로 상점에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진열된 상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1990년 초반 가족 전체가 런던으로 망명한 비묵티는 조국 스리랑카에 대한 기억이 끔찍하다고 했다. “스리랑카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스리랑카에 간 게 3년 전인데, 무서워서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제 런던이 더 편하다는 비묵티는 죽는 날까지 런던에 살 계획이라고 말했다.
물으나 마나, 거의 모든 이민자들은 비묵티와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자유는 한 번 맛보면 잊기 힘든 달콤한 맛이라고들 한다. 영국 전체 인구 6310만 중에 490만 명이 자유를 찾아 건너온 이민자들이고 이 중 절반 이상이 런던에 산다.
런던에서는 자유와 더불어 ‘빵’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영국의 최저 임금은 6파운드 정도(약 1만 원)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피커딜리의 한 슈퍼마켓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아프카니스탄 출신의 이민자 살레(24)는 “생활이 될 만큼 충분히 돈을 벌어 (조국과 달리)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된다. 나름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칼퇴근’은 이방인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은 근무 시간이 끝났다며 돌연 운행을 멈추고 승객들에게 다 내리라고 말하곤 한다. 런던 체류 초기에 필자를 더욱 당혹스럽게 한 건 승객들이었다. 아무런 항의 없이 순순히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이제 한국에 가면 ‘너무 빨리 돌아가는 현실’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이러한 느긋한 삶은 자국의 팍팍한 삶에 지친 외국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 지난 7월 19일 늦은 오후께, 런던 중심가 피커딜리서커스의 한 가게에서 스리랑카 출신의 이민자 남성이 관광 상품을 정리하고 있다. |
영국은 흔히 보수적인 나라로 꼽지만 이상하게도 타문화에 대해선 개방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전통이라 할 만한 요리가 없는 것도 현실이다. ‘그나마’ 전통으로 꼽히는 생선감자튀김(피시앤칩스)는 생각만큼 인기가 있지 않다.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인도 커리다.
인도 요리를, 런던의 이민자 문화를 마음껏 접하고 싶다면 런던 동부 브릭 레인 지역(Brick lane)에 가길 권한다. 인도 음식점들이 기다랗게 늘어서 있고 검은색 숱의 남성들이 주변에서 호객 행위를 하고 있다.
7월 18일 저녁 6시께, 런던 스위스코티지 역 인근에서 만난 인도인 서니(가명·36)는 “런던 내 인도 레스토랑 중에 인도인 요리사를 고용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며 “파키스탄 출신의 이민자들이 만든 인도 커리는 사기극에 가깝다. 절대 인도 커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런던 내 인도 레스토랑은 파키스탄 또는 방글라데시인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다수다. 런던 내 이민자의 문화가 또 다른 이민자의 문화에 얼룩지고 있다.
또 이민자들 중에 음식 솜씨가 걸출한 사람은 많지 않은 모양이다. 한 가이드 책은 “런던 내 레스토랑은 코미디에 가까울 만큼 음식맛이 형편없다. 근사한 레스토랑을 갈 바에 차라리 맥도날드 등 패스트푸드 점에 가라. 그 편이 돈이라도 아낄 수 있다”고 조롱하고 있다.
▲ 지난 7월 19일 낮 1시께, 런던 웨스트햄스테드 역 앞 거리에서 58세의 노숙자 닉이 <빅이슈>를 팔고 있다. |
7월 19일 낮 1시께, 58세의 닉은 런던 웨스트햄스테드 지하철역 앞에서 노숙자 자활지 <빅이슈>를 팔고 있었다. 전날 웨스트햄스테드 역 인근 바닥에서 잠을 잔 닉은 노숙 생활 6개월째다. 6개월 전에는 친구와 자식 집에 전전했지만, “눈치도 보이고 잔소리가 많아 거리에 나왔다.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닉은 <빅이슈>를 팔며 하루 20파운드 정도를 벌고,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허기를 채운다. 영국 물가가 비싸 보통 1파운드 하는 감자튀김 등으로 굶주린 배를 달랜다.
빅이슈의 목표는 재활이 아닌 ‘자활’이다. 친환경 화장품 업체인 ‘보디숍’의 창업자인 아니타 로딕의 남편 고든 로딕은 미국 뉴욕에 방문했다가 길거리에서 길거리뉴스(Street News)를 판매하는 데서 영감을 얻어 <빅이슈>를 기획했다. <빅이슈>는 거리 판매 등 사회적 활동을 노숙자에게 부여해 스스로 일어나도록 돕는 취지를 하고 있다. 1991년 런던에서 시작된 <빅이슈>는 현재 한국 독일 등 세계 38개국에서 선보이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자활에 성공한 노숙자들은 5398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자활이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재정 위기의 여파로 올 상반기 노숙자의 수는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약 26% 증가했다. 어느 나라든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 ‘국가 이미지’를 생각한다. 영국 정부는 런던 올림픽에 맞춰 거리에 나도는 노숙자들을 단속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 소외된 계층은 국가적 행사가 피곤한 모양이다. 인파가 몰리는 관광지 코벤트가든 광장에서 “빅이슈~”라고 외치는 토마스(46)는 올림픽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빅이슈>에 별 관심이 없다. (영어로 쓰인) <빅이슈>를 이해하지 못 할 텐데 뭐하러 사겠냐. 올림픽 기간이라 거리가 번잡하고 짜증만 난다. 빨리 올림픽이 끝났으면 좋겠다.”
# 성난 10대들
런던은 안전한 도시로 꼽혔다. 지난해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난해 8월 런던 북부 토트넘 해일 지역에서 흑인 남성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자 분노한 이 지역 10대들이 경찰서를 부수고 불을 붙였고 이후 폭동은 런던 빈민가로 번졌다. 당시 모든 신문 1면에는 불에 활활 타는 건물의 모습으로 뒤덮혔다.
폭동의 배경은 빈자와 부자 간의 격차다. 영국 정부가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공공 지출을 삭감하는 등 복지 비용을 대폭 축소하며 가난한 사람을 더욱 벼랑으로 몰았다. 대학 수업료가 3배 가까이 오르며 대학의 문턱은 더욱 높아졌다. 10대들은 언론 등을 통해 “우리는 대학 가지 말라는 말이냐”고 소리를 높였다. 당시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은 빈민 지역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성난 10대의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1년이 다 돼가지만, 10대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7월 18일 오전 11시께, 런던 동부의 빈민가 페컴에서 만난 10대 3명은 “경찰들은 쓰레기다. 우리를 잡아 가두려고 혈안이 됐다”고 외쳤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그들은 “올림픽이고 뭐고 관심이 없다. 담배나 있으면 달라”고 말하는 등 반항기가 가득했다. 주변 쓰레기통은 가득 차 바닥에 음식물 찌꺼기가 널려 있다.
페컴에서 태어나고 자란 32세의 게리(가명)은 “런던올림픽을 통해 국가가 돈을 많이 벌어 빈민 지역에도 골고루 복지 혜택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헛된 바람일 가능성이 크다. 영국 정부는 올해 초 10억 파운드의 복지 예산을 추가로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올림픽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어도 복지 혜택이 골고루 나뉘는 구조가 아닌 것이다.
관광객들은 신변을 위해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 들고 다니다가 10대 청년이 단숨에 낚아채고 달아났다고 울상을 짓는 유학생들이 종종 눈에 띈다. 관광객이라면 배고프고 성난 10대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런던에서는 부촌일지라도 도로 하나 건너면 빈민가가 나온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 지난 7월 19일 저녁께, 런던 피커딜리서커스 역 안에서 한 남성 악사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런던 지하철은 그 역사만큼이나 낡았고 퀴퀴한 냄새를 풍긴다. 저녁 6시만 되면 정장 차림의 인파가 밀물처럼 역 안에 몰려든다. 역 안이 무척 넓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다. 노선을 갈아타려 하면, 때에 따라선 100m 이상을 걷기도 한다.
이 삼엄한 지하철 안에 ‘낭만’을 불어넣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지하철 악사들이다. 지난 7월 18일 늦은 오후, 폴 스티븐스(70)가 런던 그린파크 역 안에서 바이올린을 턱에 끼고 고전 음악인 쿨리스 릴(Crooley’s reel)을 연주하자, 번잡한 역 안은 고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게 바뀌었다. 정장 차림의 50대 남성이 지나가며 스티븐스 발아래 놓인 바이올린 가방 안에 동전을 놓았다.
런던 지하철 역 안에서 공연하는 악사들은 실력파라 할 수 있다. 270여 명의 지하철 악사는 영국 교통당국(TfL)이 주최하는 9 대 1 정도의 오디션을 통과하며 음악성에 대한 검증을 마쳤다. 또 해마다 오디션보다 더 경쟁이 치열한 악사들 ‘경연’을 개최한다.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은 한 공식 석상에서 “런던 지하철 역 안에서 공연하는 악사들은 뉴욕 거리의 악사들과 견주어도 실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하철 악사는 런던의 자랑이다”고 치켜세웠다.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바이올린을 켜는 스티븐스는 실제로 하루 4시간을 연습한다고 했다. ‘수익’을 위해 공연을 하지만, 가장 행복할 때는 연주가 잘 되는 날이라고 말했다. “내가 하는 연주에 스스로 취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연주가 잘 되어야 사람들이 감명을 받고 돈을 더 많이 주기도 한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당신을 무엇을 볼 것인가?
런던=이승환 통신원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