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지켜 달라” vs “지금은 안 돼” 맞서다 김병지-양현준 재회로 원점에서 재논의
토트넘 수비진을 휘젓는 드리블을 선보이고 약 1년이 흘러 양현준은 다시 축구계 이슈의 중심에 섰다. 이번엔 경기장 밖의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에이스급 활약을 선보이자 유럽 무대에서 관심이 이어졌고 스코틀랜드 명문 셀틱에서 이적 제안이 왔다. 하지만 강원의 판단은 '현재는 이적이 어렵다'였다. 이에 유럽으로 향하고 싶은 양현준이 반발하고 나섰다. 구단과 선수 간 갈등의 골이 깊다.
#갈등의 배경
21세의 어린 나이에도 리그 에이스급 활약을 보인 양현준에게 유럽 축구는 관심을 가졌다. 유럽 구단들은 과거 한국인 선수를 영입할 때 A대표팀 활약을 '검증 수단'으로 여겼지만 최근 흐름은 달라지고 있다. 이른 시점에 어린 선수를 데려가 육성하는 전략으로 선회하는 모양새다. 이에 프로 데뷔 이전의 어린 선수들이 유럽 각국으로 향하는가 하면 정상빈(2002년생), 오현규(2001년생) 등이 이적 제안을 받고 떠났다. 특히 양현준에게 제안을 건넨 셀틱은 최근 수년간 리그 내 어린 선수들에게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강원 구단은 양현준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번 시즌 지독한 부진에 빠져 있는 탓이다. 20경기를 치른 7월 6일 현재, 팀이 올린 승수는 단 2승이다. 강등 위험권인 11위를 기록 중이다. 지난 6월 중순 감독 교체를 단행했다. 팀이 어려운 상황, 구단 내 비중이 큰 양현준을 시즌 중 이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양현준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발언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이적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양현준 측이 이적을 강하게 요청한 배경에는 과거 구단과 약속이 있었다. 강원 구단의 살림을 맡았던 이영표 전 대표이사는 한 방송에서 '신성' 양현준에게 이적 제의가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미국 무대에서 거액의 제안이 왔으나 이를 거절하고, 양현준에게 미국이 아닌 유럽 무대를 추천했고 유럽에서 제의가 오면 이적을 허락해주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영표 전 대표의 계약이 종료됐고 김병지 신임 대표이사 체제가 시작됐으나 양현준 측은 약속을 지켜달라고 주장했다. 구단은 이적 이후 재임대 등의 방식으로 2023시즌을 마치고 팀을 떠날 것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양현준은 이를 거부했다.
#깊어진 갈등의 골
7월로 접어들면서 양현준은 더 강하게 의지를 드러냈다. 지난 2일 인천 유나이티드와 경기 이후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셀틱의 이적료가 부족하다면 연봉이라도 내놓겠다"고 했다. 구단 측과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아버지와 에이전트가 면담을 요구했는데 김병지 대표가 만나주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양현준의 발언은 선수와 구단 간 대화 자체가 잘 이뤄지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줬다. 이전부터 유럽 진출에 대해 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양현준이었다. '만나주지 않는다'는 발언에 김병지 대표이사는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됐다.
김병지 대표이사도 입을 열었다. 그는 "양현준과 대화를 피하지 않았다"며 "6월 말 양현준으로부터 받은 '격려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공개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양현준의 일방적 주장에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다. 김태주 강원 FC 단장도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선수, 부모님, 에이전트와 논의를 해왔다. 이적을 허용할 수 없다는 뜻을 충분히 전달했기 때문에 최근에 나눈 대화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일부 언론에서 구단을 향해 이적을 종용하는 듯한 보도까지 나오며 양측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김태주 단장은 "이적료가 부족해서 이적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새로운 국면 맞아
절정에 치닫던 갈등은 지난 5일 양현준과 김병지 대표가 극적으로 만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앞서 김 대표는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지금과 같은 모습은 선수 이미지에도 좋지 않고 팬들에게도 상처가 된다"며 변화 가능성을 암시한 바 있다. 김 대표는 양현준과 만나 이적 불가 방침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김병지 대표는 양현준의 셀틱 이적에 '반대'만 외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단 측 거절로 이적 논의가 조기에 종료될 수 있었으나 '이적 후 재임대'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도 김 대표였다.
또 김 대표는 양현준의 아시안게임 참가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었다. 현 시점에서 유럽으로 향한다면 오는 9월 아시안게임 참가가 어려울 수 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취재에 따르면 양현준과 만난 지난 5일 김병지 대표는 구단 클럽하우스가 위치한 강릉을 방문하며 윤정환 감독과 함께 강릉시청을 방문, 시장과 면담을 가졌다. 면담 과정에서 김 대표는 이 같은 의견을 내놨다. 양현준은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U-24 대표팀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다면 향후 유럽 활동에서 군 복무라는 제약을 덜어낼 수 있다.
원점에서 새로 시작한 이적 논의는 양현준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남은 시간도 적지 않다. 지난 6월 14일 막을 올린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이적 시장은 오는 9월 1일 종료된다. 협상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반면 강원 구단으로선 더욱 바쁜 여름을 보내야 한다. K리그의 여름 이적시장은 7월 20일 종료된다. 양현준이 이탈한다면 보강을 하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이적 추진 과정 갈등 사례
해외 구단의 이적 제안이 온 상황에서 선수와 소속 구단의 갈등은 축구계에서 새삼스럽지 않다. 발언 수위 등에서 차이는 있지만 떠나길 원하는 선수, 주요 자원을 지키려는 구단 간 이견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후로도 양현준과 강원 구단 간 갈등 같은 사례는 다시 발생할 수 있다.
최근 국내 선수들의 유럽 이적 과정도 무난하지만은 않았다. 지난겨울 셀틱으로 떠난 오현규 역시 처음엔 구단의 반대에 부딪힌 바 있다. 하지만 셀틱 측에서 이적료 규모를 키우며 구단의 허락을 받아냈다. 조규성은 유럽 진출 열망을 숨기지 않았으나 '겨울 이적은 불리할 수 있다'는 전북 현대 측의 조언을 듣고 올여름 이적을 도모하고 있다. 오현규와 조규성 모두 국내 구단에서 핵심 자원으로 분류되는 선수다.
축구계 한 관계자는 "양현준 사례처럼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적을 두고 큰 갈등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며 "선수 부모님이 구단 사무실을 찾아 '큰 소리'가 나는 일도 있었다. 양현준은 빠르게 화해가 이뤄지며 오히려 원만히 진행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큰 갈등을 방지하려면 선수가 구단과 계약시 '바이아웃' 조항을 넣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바이아웃'은 일정 금액을 넘기면 소속 구단과 협의 없이 선수와 협상을 할 수 있는 조항을 뜻한다. 최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브렌트포드 유니폼을 입은 김지수가 이 같은 사례다. 브렌트포드는 성남 구단 측에 바이아웃을 뛰어넘는 금액을 이적료로 제시했고 김지수는 큰 걸림돌 없이 이적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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