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회장의 탈옥 시도는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대형 탈옥 사건들이 발생한 적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대도 조세형’ 스타덤에 올려놓은 탈주극
대도(大盜) 조세형. 사회적 불만이 극에 달했던 시절인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사이, 조세형은 주로 부유층과 고위층을 상대로 절도 행각을 벌였고 그렇게 훔친 돈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해 ‘의적’, ‘도학의 대가’ 등으로 불렸다. 이런 조세형이 유명세를 얻은 결정적 계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탈옥이었다.
1982년 11월 경찰에 체포된 조세형은 1983년 4월 14일 서울형사지법에서 결심공판을 마치고 구치소로 이감되기 직전 법원 구치감에서 탈출했다. 3층 피고인 대기 구치감에 입감됐던 조세형은 담당 교도관이 2층으로 내려가 동료 교도관과 대화하는 틈을 타 구치감 문을 발로 차고 복도로 나와 한쪽 수갑을 푼 뒤 바로 포승줄까지 풀었다.
앞서 형사 법정 대기실에 있을 때 조세형은 교도관에게 손목 통증을 호소해 교도관이 수갑을 느슨하게 해주도록 만들었다. 이런 치밀한 준비로 쉽게 한쪽 수갑과 포승줄을 풀고 구치감 벽 환풍기를 뜯어낸 조세형은 40cm가량 떨어진 2층 송치 피의자 구치감 옥상으로 뛰어내렸다. 다시 1.2m 아래인 법원 구내매점 옥상으로 뛰어내린 뒤 한일병원 담을 넘어 탈주에 성공했다.
한쪽 손목의 수갑은 풀지 못해 매달고 서울 시내를 배회하던 조세형은 15일 절도에 성공해 돈을 마련했고, 다음날 훔친 돈으로 철물점에서 줄칼을 사서 수갑을 마저 풀었다. 그렇지만 탈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탈주 6일째인 19일 오전 10시 40분 무렵 경찰에 체포된 것. 당시 매스컴에서 대도 조세형의 탈주극이 연일 보도되면서 조세형의 얼굴이 많이 알려졌고 그 모습을 알아본 시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그렇게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30분가량의 추격전이 이어졌다. 당시 조세형은 무려 주택 9채의 담과 지붕, 장독대 등을 넘어 다니며 경찰을 따돌리려 했다. 서전트 점프 높이가 무려 80cm나 돼 높은 부유층 집의 담을 쉽게 넘어다니던 대도의 능력치는 도주극에서도 활용됐다.
더 이상의 도주가 힘들어지자 민가에 숨어든 조세형은 인질극을 벌였다. 그러나 경찰이 권총으로 공포탄 2발을 포함해 4발을 발사했고, 한 발이 왼쪽 갈비뼈에 박히면서 탈주가 마무리됐다.
경위가 한 명뿐이라 비교적 경비가 허술하고 피의자가 수갑도 차지 않는 법정 내에서 외부 조력자가 소란을 피운 틈을 타 탈주하려 한 김봉현 전 회장의 탈옥 시나리오와 가장 비슷한 사례가 바로 조세형의 탈주극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헌 일당
영화 ‘홀리데이’의 바탕이 되기도 한 ‘지강헌 사건’은 희대의 인질극으로 유명하다. 그 인질극의 시작은 탈옥이었다.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대전교도소와 공주교도소, 공주치료감호소 등으로 이송되던 25명 가운데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권총을 탈취해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명 가운데 7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거나 자수했지만 5명은 일주일이 넘도록 잡히지 않았다. 5명 가운데 4명이 10월 15일 밤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고 아무개 씨 집에 잠입해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다. 지강원, 안광술, 강영일, 한의철 등 4명이 벌인 인질극은 TV로 생중계되면서 당시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지강헌은 사실 가정집에서 556만 원을 훔친 잡범이었지만 징역과 보호감호 등 17년이나 수감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강원은 탈주극과 인질극을 벌인 데 대해 73억 원을 횡령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겨우 7년을 선고받고 심지어 3년도 안 돼 풀려난 사실에 분개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이 대목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안광술과 한의철은 탈주 과정에서 탈취한 교도관 총으로 자살했고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하려다 경찰특공대가 발사한 총에 맞아 사망했다. 4명 가운데 강영일만 경찰에 체포돼 19년 동안 복역하고 석방됐다.
한편 인질극에 함께하지 않은 나머지 한 명의 탈주범인 김길호는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 1일 경찰에 검거됐다.
#교도소 문제점 드러낸 박봉선 탈옥사건
1983년 처남댁을 살해한 뒤 시체를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무기수 박봉선과 1989년 5월 가정집에 침입해 집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신광재, 그리고 1990년 5월 술집에서 폭력을 행사해 징역 장기 10월, 단기 8월을 선고받은 김 아무개 군. 이들 세 명은 1990년 12월 27일 새벽 4시 30분 전주교도소에서 탈옥했다.
이들은 작업장에서 몰래 반입한 쇠톱으로 수형실 화장실 창문의 쇠창살 2개를 자르고 교도소 선반을 잘라 만든 사다리로 수형동을 빠져나갔다. 교도소 외벽까지 몰래 이동해 사다리로 철조망까지 쳐진 4.5m의 외벽을 넘어 탈옥했다. 그렇지만 교도소에선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오전 7시 20분 아침점호 시간이 돼서야 탈옥 사실을 파악했다. 이미 이들이 탈옥하고 3시간 가까이 지난 뒤였다. 게다가 박봉선이 교도관 도움으로 외부에서 몰래 반입해 수형실에 보관하던 사복이 있어 이들은 바로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주했다.
이후 택시를 탈취해 도주하다 경찰 검문에 걸리자 흉기를 휘둘러 경찰관에 중상을 입하고 권총까지 빼앗았다. 택시 대신 승용차를 탈취해 도주했고, 다시 경찰 검문이 보이면 그 차량을 버리고 다른 차량을 탈취하는 방식으로 도주를 이어갔다. 결국 대청댐 인근에서 경찰 검문소가 보이자 차량을 버리고 야산으로 도주해 대청댐에 이르렀지만 더 이상은 경찰포위망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김 군을 자수하게 한 뒤 박봉선은 권총으로 자살했고, 신광재 역시 자살했다.
박봉선 등 세 명의 탈옥 사건은 교정당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탈옥이 이뤄지고 세 시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파악한 데다 작업장에서 쇠톱을 수형실로 반입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게다가 사복을 수형실에 보관하게 도와준 교도관까지 있었다. 경계가 허술하다는 지적을 넘어 교도소에 만연해 있던 문제점들이 드러난 것. 박봉선은 다른 수형자의 금품을 빼앗는 등 횡포를 저질렀고 교도소에서 몰래 담배를 팔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박봉선은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분류돼 있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교도관 3명이 구속됐는데, 이 중 사복을 전달한 교도관은 전주교도소 독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또한 전주교도소장은 해임됐고 교도관 10명이 파면이나 해임을 당하는 등 모두 34명이 징계를 당했다.
#16kg 감량까지 감수한 신창원
1997년 희대의 탈옥 사건이 벌어졌다. 신창원은 1989년 3월 공범 3명과 성북구 돈암동 소재의 주택에 침입해 강도 행위를 했는데, 공범 중 한 명이 집주인을 살해해 강도치사죄로 수배된다. 신창원은 그해 9월 청량리에서 검거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신창원은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됐고 1997년 1월 수용실 화장실의 작은 환풍구 철망을 뜯고 탈옥했다. 작업장에서 훔친 실톱을 신발 밑창에 숨겨 빼돌린 뒤 하루에 20분씩 두 달 동안 조용히 작업했다. 가로 32cm, 세로 28cm의 작은 환풍구로 빠져나가기 위해 신창원은 아프다는 이유로 두 달 동안 거의 밥을 굶어 무려 16kg을 감량했다. 그렇게 환풍구로 빠져나온 뒤 교도소 내 교회 공사장으로 가 환풍구에서 잘라낸 쇠창살로 공사장 가림막 아래 땅을 파고 교도소를 빠져나왔다. 이후 인근 농장으로 가 새 옷과 신발 등을 훔쳐 도주했다.
신창원은 전국에 지명수배가 됐지만 좀처럼 잡히지 않으면서 ‘희대의 탈주범’이 됐다. 1997년 12월 경찰은 경기도 평택의 한 빌라에 있던 신창원을 찾아냈지만 대치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신창원이 창밖 배수관을 타고 달아났다. 1998년 7월에도 신창원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20대 애인의 집을 경찰이 덮쳤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결국 검거된 것은 1999년 7월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였다. 그 집을 방문했던 가스레인지 수리공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것. 순천경찰서는 경찰관과 전경 등 50여 명을 현장에 투입해 검거 작업에 들어갔다. 은신처를 덮치고도 신창원을 놓친 경험이 있는 경찰은 우선 해당 아파트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무장 경찰이 베란다의 창문으로 몰래 들어가 신창원을 덮치는 동시에 현관문을 열어 경찰을 추가 투입하면서 결국 검거했다. 탈주극을 벌인 기간만 3년 6개월. 신창원의 당시 탈주극은 이후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법정에서 교도관 찌르고 도주한 정필호
2000년에는 정필호의 광주지법 법정 탈주 사건이 벌어졌다. 정필호는 다른 수용자 노수관, 장현범 등과 함께 광주지방법원 법정에서 교도관을 찌르고 달아났다. 이 사건의 가장 큰 논란은 어떻게 이들이 법정에 흉기를 소지하고 들어올 수 있었느냐다.
정필호는 교도소에서 다른 수용자들의 도움을 받아 감방 내 방범창 틀을 길이 25~26cm정도로 잘라낸 뒤 화장실 시멘트 바닥에 갈아 흉기를 만들었다. 이후 1월 27일 호송버스에서 노수관, 장현범 등에게 계획을 전달한 정필호는 2월 24일에 탈옥을 시도했다.
이날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옷을 껴입은 뒤 허리춤에 흉기를 감춘 정필호는 수용자들이 대거 검신대를 통과할 때 자연스레 검신대 옆을 지나가는 방식으로 법원에 들어왔다. 이후 법원 대기실 화장실에서 노수관과 장현범에게 흉기를 건넸다.
광주지법 법정을 탈출한 이들은 카렌스 차량을 빼앗아 도주한 뒤, 이 차를 버리고 전북 순창에서 다시 엘란트라 승용차를 훔쳐 전주로 이동했다. 그리고 화물트럭 뒤칸에 몰래 탑승해 서울로 왔지만, 다음날 오전 7시 35분 무렵 서울 중구 평화시장 부근에서 노수관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날 오전 11시 50분 무렵 경기도 안산시 월피동 주택가에서 장현범도 체포됐다.
정필호는 탈주 13일 만인 3월 7일에 검거됐다. 정필호가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발신지 추적을 통해 그가 애인 집 인근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경찰은 바로 인력을 대거 그 지역에 투입했다.
낌새가 이상하다고 여긴 정필호는 라노스 승용차를 탈취해 도주했지만 경찰이 쏜 총이 바퀴에 명중하면서 차량이 멈춰 섰다. 다시 정필호는 택시에 올라타 택시 기사를 흉기로 위협하며 도주극을 이어가려 했지만 출근 시간대 교통정체로 멈춰섰고 경찰이 격투를 벌인 끝에 정필호를 검거했다.
#병원에서 도주해 병원에서 잡힌 이낙성
2005년 4월 7일 새벽 1시쯤 안동의 한 병원에 치핵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 이낙성은 자신을 감시하던 교도관이 졸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복 위에 교도관 점퍼를 걸쳐 입고 도주했다. 이낙성은 2001년 말 강도상해 혐의로 체포돼 징역 3년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고 2004년 1월 말부터 청송감호소에서 수감 중이었다.
새벽 4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 앞에서 교도소 동기를 만나 도피자금을 전달받고 옷을 갈아입은 이낙성은 오전 5시 30분쯤 서울 지하철 2호선 사당역 근처를 마지막으로 1년 6개월가량 완벽하게 경찰 감시망에서 사라졌다. 경찰이 1000만 원의 보상금을 내걸고 전국 9개 지방경찰청에 30개 팀 116명의 전담반을 구성했지만 전혀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도주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낙성은 북창동 인력시장을 통해 일자리를 구해 구리와 마포 등지의 중국음식점에서 설거지 등의 일을 하며 지냈다.
검거된 것은 2006년 10월 31일이다. 이날 오후 이낙성은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 성수동의 한 치과병원을 찾았다. 2층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이낙성은 윗니 3∼4개가 완전히 빠지고, 아랫입술이 심하게 찢어져 수술이 필요했다. 수술을 받으려면 병원에 자신의 신상정보를 알려야 하는데 이낙성은 무협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대고 머리를 다쳐 주민등록번호가 기억이 안 난다며 버텼다. 그럼에도 병원 측이 거듭 신상정보를 요구하자 이낙성은 “내가 이낙성이다. 감옥에서 나왔다. 경찰이 올 거다”라고 말했다. 이에 병원 관계자가 경찰에 신고했는데 그제야 마음을 바꾸고 도주한 이낙성은 인근 은행지점 앞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이낙성이 탈주 중이던 2005년 8월에 보호감호처분 제도는 폐지됐다. 만약 이낙성이 병원에서 도주하지 않았다면 4개월 뒤에 풀려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1년 6개월이나 탈주극을 벌이며 숨어 지냈던 이낙성은 결국 검거돼 다시 실형을 살아야 했다.
#‘대구 통아저씨’ ‘후시딘남’ 등으로 불린 최갑복
가장 미스터리한 탈옥 사건의 주인공은 최갑복이다. 그는 두 번이나 탈주극을 벌여 모두 성공한 희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우선 1990년 7월 31일 검찰 심문을 받고 대구구치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도주했다. 호송버스 맨 끝 좌석에 앉아 포승줄을 풀고 쇠창살 1개의 용접 부분을 부순 뒤, 차가 서행할 때 도주했다. 그렇지만 3일 만에 검거됐다.
2012년 9월 17일 대구에서 발생한 두 번째 탈주로 인해 최갑복에게는 유치장 미꾸라지, 대구 통아저씨, 문어인간, 후시딘남 등의 별명이 생겼다. 이날 최갑복은 대구 동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있다가 도주했는데 유치장의 가로 45cm, 세로 15cm 크기의 배식구를 통해 빠져나와 1층의 2m 높이 창문의 가로 79cm, 세로 13.5cm 크기 창살 틈을 통해 달아났다. 그것도 단 4분 만에 이 두 틈을 모두 빠져나갔다.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좁은 틈으로 빠져나갔느냐다. 의사 등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고 JTBC에선 ‘통아저씨’ 이양승 씨에게 비슷한 조건의 나무 세트를 만들어 의뢰했지만 그 역시 실패했다. 당시 경찰이 “영상이 공개될 경우 해외토픽으로 다뤄질 것이 우려된다”며 CCTV를 공개하지 않아 각종 음모론이 불거졌다. 다른 방법으로 탈주했는데 경찰이 책임을 회피하려 말도 안 되는 탈주 방법을 발표했다는 것. 결국 경찰이 CCTV를 공개했고 모두 사실이었다.
당시 최갑복은 얼굴과 몸이 좁은 틈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오기 위해 다른 피의자가 치료용으로 경찰에게 받은 후시딘 연고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최갑복은 유치장을 탈출한 지 엿새째인 9월 22일 오후 경남 밀양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검거됐다. 밀양의 한 농가에서 음식 등을 훔친 뒤 “죄송하다”는 쪽지까지 남겼는데 주민들이 이를 신고해 경찰이 출동한 것. 검거 당시에도 주택 두 곳의 담을 뛰어 넘는 등 경찰과 추격전을 벌인 끝에 검거됐다.
숨진 채 발견된 홍승만과 사다리 탈옥 시도 정두영
2015년에는 무기징역으로 복역하다 귀휴를 나갔던 무기수 홍승만이 탈주한 사건이 있었다. 홍승만은 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전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이후 귀휴를 나갔다가 복귀 예정일인 4월 17일 도주했다. 그러나 홍승만은 도주 9일 만에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남 창녕군 장마면 장가리 뒷산에서 목을 매 숨진 상태였는데 현금 80만 원과 세 장 분량의 유서도 함께 발견됐다.
탈옥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경찰은 “그 어떤 방법으로 탈옥할지라도 결국 검거돼 교도소로 돌아온다”고 강조해왔고 실제로 대부분 검거됐다. 그렇지만 귀휴 과정에서 도주한 홍승만은 결국 잡지 못했다. 귀휴에서 복귀하지 않고 도주할 때 이미 결심한 것인지, 아니면 도주 과정에서 힘겨워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2016년 8월에는 탈옥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그 주인공은 ‘연쇄살인범’ 정두영이다. 정두영은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부산과 경남, 대전, 천안 등지에서 23건의 강도·살인 행각을 벌여 모두 9명을 살해하고 10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연쇄살인마’ 유영철이 검찰 조사에서 “정두영 연쇄살인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한 월간지를 보고 범행을 착안했다”고 밝혔을 정도다. 정두영은 2000년 12월 부산고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상고를 포기해 사형수가 됐다.
정두영이 탈옥을 시도한 대전교도소 작업장에는 높이가 다른 세 개의 담이 있다. 1차 담은 철조망, 2차 담은 감지 센서가 있고 3차 담은 일반 콘크리트로 세 개의 담은 수 m의 간격을 두고 설치돼 있다.
세 개의 담을 넘기 위해 정두영은 자동차업체 납품용 전선을 만드는 작업실에서 자투리 전선 등으로 몰래 사다리를 만들었다. 사다리는 무려 높이가 4m나 됐다.
8월 8일 오전 7시 정두영이 작업실 창문으로 사다리와 모포를 던진 뒤 철조망이 설치된 1차 담을 넘었다. 바로 2차 담을 넘었는데 여기엔 감지 센서가 있다. 센서가 울리며 비로소 교도관들이 탈옥 사실을 파악했지만 2차 담 어디에서 탈옥이 이뤄졌는지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제 가장 쉬운, 일반 콘크리트로 된 3차 담만 넘으면 되는데 여기서 정두영의 탈옥 시도는 중단됐다. 4m 높이의 사다리가 두 번의 담을 넘는 과정에서 휘어져 부서지고 만 것. 단 7분 만에 두 개의 담을 넘었지만 결국 탈옥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2000년대 이후에는 교도소나 구치소, 내지는 호송버스 등에서 범죄자가 탈주한 사건은 많지 않다. 2000년 정필호의 광주지법 법정 탈주 사건은 법정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이런 방식도 사실상 이게 마지막이었다. 2005년 이낙성의 탈주는 병원에서 벌어졌다. 그나마 2012년 벌어진 최갑복 탈주 사건이 유치장에서 벌어졌다. 물론 당시 유치장의 경계가 허술했다는 지적이 이어지긴 했지만 그 좁은 배식구와 창살 틈을 성인 남성이 빠져나갈 것이라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1980~19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이후에는 교정당국의 시스템이 선진화하면서 허술했던 경계가 탄탄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정두영의 탈옥 시도로 인해 다시 교정당국에 비판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정두영이 교도소 작업장에서 몰래 4m나 되는 사다리를 만들었지만 대전교도소는 이를 전혀 몰랐으며 두 번째 담을 넘어 감지 센서가 울렸는데도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만약 사다리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유유히 교도소를 탈옥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정두영은 연쇄살인범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