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지난 6월 미국계 자산운용사 엘리엇이 제기한 국제투자분쟁 해결절차(ISDS)에서 5358만 달러(약 690억 원)를 배상하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자와 법률비용을 합하면 13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주 전경련이 산하 연구원인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과 통합하고, 이름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변경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핵심은 전경련 이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이 전경련으로 복귀하는 데 있다. 이들은 복귀를 결정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전했으나 이미 사전 교감이 이루어졌고 여론을 살피며 조심스레 추진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국민의 열망으로 대통령을 탄핵했지만 위 두 사건은 정경유착, 대기업집단의 후진적 거버넌스 등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직면해온 구조적 문제는 거의 개선되지 않은 현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엘리엇 사건에서 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을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에 귀속되는 국가의 조치로 보았고, 그로 인해 합병이 통과될 수 있었기에 합병 전 삼성물산 주주에게 손해가 발생했다고 인정했다. 이 합병에서 삼성물산 주주는 국적과 상관없이 불공정한 합병비율로 손해를 입었다.
그런데 엘리엇처럼 우리나라를 상대로 ISDS를 제기할 수 있는 국가의 주주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를 위해 뇌물을 주고받거나 실제로 부당한 외압을 행사한 불법행위자가 아닌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국민연금(11.2%)은 당시 엘리엇(7.1%)보다 훨씬 많은 지분을 가졌지만 엘리엇처럼 ISDS로 손해를 보전할 수 없다. 결국 ISDS는 자유무역협정 체결 국가의 투자자를 다른 국가나 내국인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취지의 제도이고 필연적으로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ISDS 제도 자체의 문제나 ISDS 대상인 국가 ‘조치’의 범위, 엘리엇이 입은 손해의 구체적 규모와 별개로, 판정의 주요 내용 자체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 및 뇌물죄, 이재용 회장 등 삼성그룹 주요 관계자에 대한 뇌물죄, 당시 경제수석비서관, 보건복지부 장관, 기금운용본부장에 대한 유죄 인정 등을 통해 삼성그룹 지배권 승계를 위해 정부 수반의 권한이 남용됐다는 사실이 모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만 본다면 이번 판정은 사실 새로울 게 없다.
그렇다면 엘리엇보다 큰 손해를 입은 국민연금은 어째서 여전히 손해보전을 시도하지 않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정부도 확정 전이지만 만일 엘리엇에 손해를 배상한다면, 국고 피해를 어떻게 보전할지에 대해 답해야 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여전히 요지부동이고 ISDS를 소관하는 법무부도 국고에 발생할 수 있는 손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전경련은 1961년 4·19 혁명 이후 사법적 처벌의 기로에 놓여 있던 대기업 총수들과 집권을 공고히 하려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대가 서로 맞아 떨어지며 탄생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명칭이 한국경제인협회였다. 이후 지난 국정농단 사태까지 전경련은 대한민국 정경유착의 역사 그 자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경련이 지난 역사를 얼마나 반성했는지, 재발 방지를 위해 그간 어떠한 구조적 개혁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들어 정책이나 국외 행사 등에 조력자 역할을 적극 자처하는 모습을 볼 때, 반성과 개혁이 아닌 과거 회귀를 택한 것은 아닌지 크게 우려된다. 전경련과 통합하는 한경연은 청와대 개방과 집무실 이전의 경제효과가 수조 원에 이른다는 낯 뜨거운 보고서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전경련이나 핵심 당사자인 삼성 측이 이번 ISDS 판정에 관해 어떠한 입장을 밝히거나 국민연금과 국가에 발생할 수 있는 손해를 어떻게 책임질지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보도는 보지 못했다.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실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전경련이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노종화는 회계사이자 변호사다. 현재(2017년 5월~) 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상근)으로도 재직 중이다.
노종화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