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이 승진시켜 주신대" 이해 못할 말로 접대 강요
파출소장의 지시로 80대 남성을 마주해야 했던 여경 박인아 경위의 사건은 7월 7일 경찰 내부망인 '현장활력소'의 게시글로 공론화됐다. 박 경위는 "서울청에 갑질 피해 사실을 신고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담당자와 연락이 안 된다"며 "담당자 분은 (이 글) 보시면 연락 좀 주십시오"라고 운을 뗐다.
사연은 2023년 4월 19일 파출소장한테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서울 성동경찰서 금호파출소의 소장은 박 경위한테 '지역 회장님'과의 점심에 참석하라고 요구했다. 박 경위가 이전부터 여러 차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이날은 '식사 약속이 잡혔다'며 더욱 보챘다. 회장이란 인물은 경찰과는 무관한 80대 노인이다.
박 경위는 마지못해 자리에 나가게 됐다. 가볍게 설렁탕 한 끼로 식사를 마치는 듯했으나 파출소장은 "회장님 사무실에 가려면 음료수를 준비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이에 박 경위는 파출소까지 뛰어가 업무추진비 카드를 챙겨 회장 사무실까지 따라 들어갔다. 건물 앞에서는 억지로 사진촬영까지 했다.
박 경위는 회장 등의 추태가 사무실에서 더욱 심해졌다고 주장했다. 줄곧 같이 있기 싫은 내색을 보인 데 대해 잠깐 미안함이 들어 의례적인 칭찬을 던진 게 실수였다. 회장의 옛 사진을 보고 '젊은 때 멋지셨네요' 말하자, 갑자기 회장은 박 경위의 손을 잡고 끌어안으며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회장은 박 경위를 '파출소장의 비서'로 부르며 과일도 깎도록 시켰다. 불쾌감과 모욕감 속에서도 박 경위는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아 오렌지 몇 개를 손질했다. 마땅히 파출소장은 '비서가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과일 깎기 역시 못하도록 제지했어야 하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 후에도 박 경위는 강요에 시달려야 했다. 파출소장은 '회장님 호출'이라며 박 경위를 자리에 또 불렀다. 몸이 아파 거절해도 "회장님이 승진시켜 주신대", "500만 원이면 승진할 수 있냐더라" 등 이해 못할 말들이 파출소장 입에서 나왔다. 박 경위는 2023년 5월 관련 녹취록 등을 서울경찰청 청문감사실에 제출하고 조사를 촉구했다.
#"조직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전개됐다. 박 경위는 서울청에 소장과의 분리조치를 요구했지만 15일 병가 후 복귀했는데도 달라진 게 없었다. '부서 이동이 아니어도 좋으니 근무 시간이라도 겹치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박 경위가 여러 번 문제를 제기하자 약 한 달 만에 파티션이 설치된 게 고작이다.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었던 박 경위는 병가를 반복했다. 그 사이 파출소장은 박 경위의 근태 불량 등의 사례를 수집했다. 그러면서 '근무복을 제대로 갈아입지 않았다', '관서 여비를 함부로 썼다'는 등의 주장을 펴며 박 경위를 역으로 감찰부서에 신고했다. 박 경위는 허위사실이라고 맞선 상태다.
결과적으로 파출소장은 감찰 결과 '직권경고' 처분에 그쳤다. 경미한 사안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지도 않는 가벼운 처분이다. 일찍이 나온 결과지만 박 경위는 이마저 현장활력소에 글을 올린 뒤에야 알게 됐다. 진정인에게 감찰 결과를 통보해야 한다는 경찰 내부 규정이 없는 탓이다.
박 경위는 7월 13일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분리 조치를 계속 요구했는데 해당 파출소장은 지난주에야 치안지도관으로 자리를 옮겼다"며 "지구대와 파출소 등을 돌며 직원들을 관리·감독하는 역할로, 최근에는 제가 일하는 파출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들어와 업무를 지도하는 등 절차가 정상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파출소장의 갑질만큼이나 조직의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마음의 상처가 컸다"며 "감찰 부서에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고 말하자, '나도 먹는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오는 등 2차 가해도 심각해 우울증은 물론 세상을 등질지까지 고민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파출소장은 '각 상황에 대한 반론'과 '박 경위에 사과할 의사' 등의 질문에 대답을 주지 않았다. 문제가 된 회장은 지역 유지로 알려졌다. 이번 논란에 대해 주변에 "노화로 심신이 악화한 상태"라는 등의 취지로 말해왔다고 전해졌다.
[인터뷰] 박인아 경위 "갑질 당사자가 치안지도관이라니…"
박인아 경위는 7월 13일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경찰의 비정상적인 절차'와 '미흡한 성인지 감수성' 등을 문제로 꼬집었다. 아래는 박 경위와의 일문일답.
―사안을 공론화한 후 파출소장 등의 사과는 없었는지.
"없었다. 오히려 저에 대한 감찰을 요구했는데 무슨 이유로 사과를 하겠나. 파출소장은 올해 12월 30일자 정년퇴임한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부담이 없는 입장 아니겠나."
―분리조치는 결국 받아들여졌나.
"파출소장이 지난주 치안지도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마저도 감찰에 따른 조치가 아니다. 제가 워낙 강하게 요구하니 받아들여진 조치인데, 치안지도관은 지구대와 파출소 등을 돌며 직원들을 관리·감독하는 역할이다. 제가 근무하는 파출소로 감독 순시를 나와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저희 직원들을 교양하고 가신다. 갑질 신고 대상자인데 이런 자리로 옮겨주면 앞으로 일선 경찰관들 중 누가 갑질 신고를 할 수 있겠나."
―경찰 내 구조적인 문제도 원인일 수 있나.
"성인지 감수성을 키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실 대단히 실망했다. 제가 약 15년 전에 순경으로 들어왔을 당시의 수준 그대로다. 문제가 된 파출소장의 경우 실제로 저를 비서 대하듯 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데리고 다닐 만하니까 데리고 다니지' 식의 태도다."
―회장이란 사람이 '500만 원 승진' 발언은 무슨 뜻인가.
"저도 모르겠다. 저를 주겠다는 건지 본인이 다른 데에 어떤 용도로 쓴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제가 경감으로 승진하는 데 500만 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파출소장과 회장이 서로 필담까지 주고받았다던데 그 둘만 아는 얘기인 것 같다."
―감찰과 관련한 불만도 클 것 같은데.
"감찰 부서에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고 말하자, '나도 먹는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심각한 2차 가해다. 우울증은 물론, 세상을 등질지까지 고민할 만큼 충격이 컸다. 파출소장을 징계하지 않은 것은 결국 퇴직자 보호를 우선한 조치로밖에 안 보인다. 지휘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싶다. 실제로 파출소장은 '박인아가 날아갈 것이다'라는 식의 말을 주변에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제게 더해진 상처는 몹시 컸다. 주변에서도 '곧 퇴임할 사람을 뭐하러 신고했냐'는 지적이 따랐을 정도다. 저에 대한 감찰은 파출소장 잘못을 물타기 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