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거실이 아니라 다른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곳에는 대형 김치냉장고 세 개가 나란히 보였다. 그 중 하나의 문이 열려 있었다. 당장 눈치 챘다. 가지고 온 현찰과 보석, 금을 거기다 집어넣으라는 걸 눈치 챘다. 거실로 나가 권력 실세에게 세무조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다음 날 세무조사팀이 안개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정치권 실세의 막강한 힘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증거가 없으면 이런 말들은 모두 거짓이 된다. 그러나 그 친구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 텔레비전 화면에서 권력실세를 보면 자꾸만 김치냉장고가 떠올랐다. 나는 김치를 먹는데 그 사람은 보석과 금을 먹었다.
실세가 먹으면 중한 뇌물도 가벼운 정치헌금으로 바뀐다. 모든 사람이 법제도 아래서 질서를 지키며 맑게 산다. 땀 흘려 번 돈이 은행에 입금되면 흐름이 유리알 같다. 현찰도 많이 꺼내지 못한다. 약간의 소득에 대해서도 칼같이 세금이 부과된다. 조금 돈을 벌면 세금폭탄을 맞는다. 심지어 건강보험료도 갑자기 소나기같이 부과된다. 정치권의 실세는 달랐다. 그는 법을 지배했다. 부정부패가 없는 더욱 정결한 대한민국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며칠 전 중국통인 교수와 만났다. 그는 중국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1퍼센트쯤인 공산당 간부가 귀족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노예인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의 민중은 저항할 줄 모른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맑아져 가는 건 사회의 저변에 생성된 거대한 에너지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 힘은 거대한 토네이도처럼 지나가는 길의 모든 것을 공중으로 날려버려 파괴할 수도 있고 격류 같은 여론이 되어 썩은 권력을 단죄할 수도 있다. 산업화에 이어 우리는 시민의 저항이라는 민주화를 이루었다. 이제 그 힘은 정치권뿐 아니라 수사나 언론 등 모든 분야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며칠 전 저축은행장을 지낸 사람이 연락을 했다. 검찰에서 뇌물 제공의 정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변호사인 나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을 밝혔으면 좋겠다고 했다. 미운 놈, 약한 놈만 골라 기소할까봐 그런 것 같다. 검찰의 독점적이고 편파적인 기소권 행사도 권력의 남용으로 비칠 수 있다. 단번에 기존의 세계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세상이 나오는 변혁은 없다.
세상이 점차 변하고 있다. 예외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있다. 기업의 비자금도 이제는 만들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사회 분위기라면 재벌 회장이라도 집행유예가 계속 선고되기는 힘들 것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법이 바로 서는 사회, 가을 계곡물같이 맑은 사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변호사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