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종오가 7월 28일(현지시각) 남자 10m 공기권총 결선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진종오는 진화한다
진종오는 사격을 늦게 시작했다. 남춘천중 2학년 때인 1993년에 사격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대회에 출전하는 등 엘리트 선수로 발돋움한 것은 강원사대부속고 입학 후인 1995년이다. 진종오의 강점은 늦게 시작했지만 계속해서 ‘진화’했다는 점에 있다.
2002년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과 은메달을 땄다. 이어 2004 아테네올림픽 50m에서는 본선 1위로 결선에 진출했으나 7번째 격발에서 6.9점을 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며 은메달에 그쳤다. ‘새가슴’이라는 비난에 시달렸고, 스스로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절치부심 4년을 기다린 진종오는 2008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따며 4년 전 아픔을 씻어냈다. 그런데 이때 10m 공기권총 은메달에 그친 것이 아쉬움이었다.
다시 4년이 지났고, 이번 런던올림픽에서는 4년 전 베이징에서 금을 뺐긴 팡웨이(중국)를 제치고 1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한 번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 진종오의 최대 무기인 것이다.
▲ 부인 권미리 씨가 자택에서 진 선수의 사진을 바라보며 기쁨을 함께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
한국선수 중 하계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딴 선수는 ‘신궁’ 김수녕이다. 금메달 4개에 은메달과 동메달을 하나씩 추가했다. 현재 진종오는 3번의 올림픽에서 금 2개, 은 2개다. 아직 런던올림픽에서 주종목인 50m 권총이 남아있는 까닭에 5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사격이라는 종목의 특성. 사격은 체력 부담이 적어 올림픽에서 최고령 선수가 가장 많이 나오는 종목으로 유명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가 스웨덴의 ‘사격영웅’ 오스카 스완이다. 그는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 사격 러닝 디어 단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64세 258일이었다. 스완은 8년 뒤인 1920년 앤트워프올림픽에 아들인 알프레드 스완과 함께 출전했다. 만72세의 나이였지만, 그는 당당히 은메달을 목에 걸며 역대 최고령 메달리스트 기록을 세웠다. 사격에서의 노장투혼은 지금도 계속된다. 28일 진종오의 10m 권총 결선 때도 47세의 핀란드 선수가 함께 겨루는 등 30대 후반까지는 충분히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진종오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와 2020년 올림픽까지 노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다올림픽 출전에, 최다 메달 획득은 진종오의 몫이 된다.
▲ 우승을 차지한 진종오가 김선일 감독을 끌어안고 있다. 사진출처=런던올림픽 홈페이지 |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사격은 스포츠 약소국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스포츠강국으로 뻗어나가는 데 선봉에 섰던 종목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으로 유명한 ‘피스톨 박’ 박종규가 군사정권 시절 사격회장을 맡아 사격발전을 이끌었다. 그리고 1978년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세계선수권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고위공무원 사격대회가 열리는 ‘사격열풍’이 불었다. 이후 사격열기가 시들기는 했지만 사격이 대중화된 나라가 많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격이 전통적으로 한국인이 강세를 보이는 종목이라는 점이다. 차영철(88올림픽 은), 여갑순, 이은철(이상 92바르셀로나 금), 강초현(2000시드니 은) 등 전통적인 메달밭이었다. 북한은 더 심해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적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쏘았다”고 소감을 말한 리호준,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7관왕 서길산 등 세계적인 선수들을 배출해왔다. 사격은 양궁과 함께 무엇인가를 조준해 맞히는 종목에서는 한국인의 DNA가 특별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진종오의 사격은 얼마나 정확할까. 진종오는 한 TV 예능프로그램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아내(2006년 결혼)의 부탁으로 경기장 밖에서 총을 쏜 경험이 있다. 유원지에서 아내가 ‘얼마나 총을 잘 쏘는지 보고 싶다’고 해서 비비탄총을 쐈다.” 결론은 예상대로다. 총의 상태가 시원찮았지만 세계 최고의 총잡이는 한 번만 쏴보고도 바로 영점을 잡았다. 주인장이 놀랄 정로도 높은 점수를 얻어 제일 큰 인형을 땄다.
진종오를 비롯한 사격선수들이 양복점에 옷을 맞추러 가면 항상 겪는 일화가 있다. “똑바로 서세요!” 분명히 바로 섰는데 재단사로부터 이런 주문을 받는다. 워낙에 한쪽 어깨만을 쓰다보니 몸이 틀어져 있는 것이다. 그 정도로 엄청난 연습을 소화해야 한다. 여기에 경기 때 겪는 엄청난 심리적 부담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진종오는 평상시에도 무척 섬세하다. 훈련 중 잠시 자리를 비울 때도 꼭 다른 신발로 갈아 신는다. 사격을 할 때 신는 운동화는 절대 접어신지도 않고, 다른 데서는 신지 않는 것이다. 땅을 짚고 서 있는 감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손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항상 신경을 쓴다. 2010년에는 독일로 날아가 자신이 집적 고안한 맞춤형 손잡이를 만들기도 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진종오 스스로 “절대 2세에게는 사격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다.
▲ 한국에 첫 금메달을 선사한 진종오(가운데)가 시상대에 올라 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올림픽에 3회 연속 출전해 금2, 은2개를 획득했다. 연합뉴스 |
진종오를 지도하고 있는 김선일 남자권총 감독은 일찌감치 언론에 부탁을 했다. “진종오가 28일 금메달을 따도 언론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 이유는 5일 열리는 50m 권총 경기 때문이다. 마인드컨트롤이 중요한데 인터뷰에 들뜨다 보면 다음 경기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 후 나온 진종오의 소감이 별로 없다. 국내언론에 한 아주 짤막한 소감은 “사격을 사랑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였다. 뭐 특별히 감동도 없고,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멘트지만 진종오를 안다면 사실 이것이 정답일 것이다. 런던올림픽 메인홈페이지에서는 진종오는 “한국의 첫 금메달이기에 매우 행복하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금메달이다”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진종오를 잘 아는 김선일 감독은 “오늘은 진종오가 정말 커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침착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2002년 진종오가 국가대표가 될 때 룸메이트였다. 당시 김 감독은 부동의 국가대표였고, 처음으로 대표팀에 들어온 진종오와 방장과 방졸로 만난 것이다. 이미 그때 김 감독은 진종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모두 물려줬다. 2003년 김 감독이 현역선수를 마감하고 대표팀 코치가 된 후에는 실과 바늘처럼 그를 지도했다. 이런 김 감독이 진종오의 강심장을 칭찬할 정도면 그것이 정답인 것이다.
진종오 선수의 아버지 진재호 씨(63)는 아들이 마지막 사격에서 10점을 맞히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는 순간 왈칵 눈물을 글썽이며 “종오의 금메달은 손주 ‘리오’가 준거야”라고 말했다. 진종오는 오는 연말 결혼 6년 만에 2세를 얻을 예정이다.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다 보니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 아이가 생기지는 않은지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올림픽 직전 아내의 뱃속에 아이가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으니 기쁨이 컸다. ‘리오’라는 태명도 직접 지었다. 아내 권미리 씨와 자신의 이름 끝글자를 합친 것이다. 진종오는 일찌감치 올림픽을 앞두고 “태어나는 아이에게 금메달을 선사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리고 약속을 지킨 것이다.
진종오의 취미는 낚시와 독서다. 올림픽을 앞두고 아내와 소속팀 임원이 선물한 <일만시간의 법칙>과 <와칭>이란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시간이 생기면 훌쩍 낚시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학시절 축구를 하다 다친 어깨가 10년이 넘게 말썽을 부리지만 이를 이겨내는 것도 독서와 낚시를 통해서였다. 런던올림픽을 마친 후에도 가장 하고픈 것이 ‘낚시여행’이다. 낚시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낚시를 좋아한다. “큰 대회를 마치면 한국에서 바다든 민물이든 낚시를 실컷 하고 싶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
런던=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