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g 증량 ‘살크업’ 상태에서 악역 변신…“압도되는 선배님들 연기, 민폐 되고 싶지 않았죠”
“류승완 감독님이 전화를 한 통 주셔서 ‘영화 하나 만들려는데 같이 해 볼래?’ 하시는 거예요. 대본도 안 보고 바로 알겠다고 말씀 드렸죠. 그런데 대본을 받곤 놀랐어요. ‘이런 역을 주시다니’(웃음). 너무 감사했죠. 연기하기에 꽤 재미있고 매력적인 인물인데 사실 저란 배우한텐 들어오기 쉽지 않은 역할이에요. 이제까지 악독하고 누군가를 괴롭히는 역할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맨날 괴롭힘을 당하는 역이었지(웃음). 감독님께서 제 어떤 부분을 발견하고 제안 주셨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역이 왔다는 데에 참 감사하더라고요.”
영화 ‘밀수’는 군천이라는 가상의 바닷가 마을에서 물질을 하며 살아가다 생계의 위협을 맞닥뜨린 해녀 무리가 어쩔 수 없이 밀수 범죄에 뛰어들게 된 이야기를 그린다. 극 중 박정민이 연기한 장도리는 뜨내기 출신으로 해녀 무리의 리더 진숙(염정아 분)의 아버지 밑에서 뱃일을 배우다 밀수 범죄에 가담하게 되면서 조금씩 악당으로 변모하는 인물이다. 순박하고 어리바리한 막내 일꾼에서 군천을 쥐락펴락하는 조직의 1인자가 된 장도리는 과거 자신이 늘 쩔쩔매던 해녀 누님들 앞에서 갖은 건방을 떨며 온갖 수모를 안겨주는 모습으로 관객들까지 그에게 치를 떨게 만든다. 그럼에도 마냥 미워하기만 할 수 없는 악역인 것은 그를 연기하는 박정민과 류승완 감독이 합세해 곳곳에 숨겨 놓은 유머 코드 덕이었다.
“처음엔 장도리의 변모를 어떻게 하면 절묘하게 보여주고 또 부드럽게 넘어갈까를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데 나중엔 ‘굳이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가져가되 대놓고 확 변해 보자, 이렇게 접근하니까 오히려 더 재미있게 촬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장도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관객들을 웃겨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는데, 딱 이 정도론 생각했어요. ‘이 인물이 나왔을 때 관객들이 조금은 긴장을 덜고, 숨을 쉬면서 볼 수 있겠다’고. 그런 포지션이 돼야 선배님들이 하시는 영화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늘 ‘괴롭힘을 당하는’ 역할을 맡다가 ‘신명나게 괴롭히는’ 역할을 연기하려니 초반엔 캐릭터의 감은 잡혀도 연기의 방향은 잘 잡히지 않았다는 게 박정민의 이야기다. 연기력이 받쳐주더라도 장도리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박자를 맞추지 않는다면 관객들이 이 캐릭터를 박정민과 분리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우려였다. 다행히도 그런 고민과 걱정은 장도리의 외형을 한 단계씩 완성해 나가면서 조금씩 떨칠 수 있었다고 박정민은 귀띔했다.
“그때 10kg 정도 증량한 상태였어요. 원랜 감독님이 몸을 단단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만들어가던 중이었는데 아직 ‘살크업’(살+벌크업의 합성어. 몸을 만들기 위해 살을 찌우는 단계)된 상태인 걸 보시고 그대로 찍자 하시더라고요(웃음). 머리도 ‘파마 한 번 해보자’ 해서 하고…. 그런 외형적인 모습들이 갖춰진 채로 처음 장도리 분장을 했던 날 진짜 신이 났어요.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무기다’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장도리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려면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는데 그런 외적인 것들이 도움을 많이 줬죠. 역시 옷이 날개다(웃음).”
영화사상 최초의 해녀 액션을 선보인 ‘밀수’에서는 큰 스케일의 액션 신이 지상과 해저, 두 번에 나눠 등장한다. 장도리의 조직이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조인성 분)를 덮치면서 시작되는 호텔 액션 신과 목숨을 건 마지막 밀수를 앞두고 진숙과 춘자(김혜수 분)의 해녀 무리와 장도리의 조직이 바다 속에서 붙는 수중 액션 신이다. 두 커다란 액션에 유일하게 모두 참여하다 보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지만, 정작 배우 본인은 “저는 남들의 절반밖에 고생을 안 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저는 호텔 액션 신에서도 보시면 액션을 별로 안 했고 수중에서도 그랬어요. 남들의 절반밖에 고생을 안 했는데 두 액션 신에 다 나오는 바람에 발품만 많이 팔렸던 거죠(웃음). 수중 액션을 준비할 땐 진짜 너무 신났어요. 제가 안전 장비 없이는 물가를 잘 안 가는데 산소통 하나 물려주니까 제가 마치 물개가 된 것처럼 돌아다니더라고요. 수중 액션이 좀 더 있었으면 했는데 없어서 아쉬웠죠. 호텔 액션이나 배에서 하는 액션은 다른 분들이 고생하시고 전 뒤로 빠져있었어요. 면목 없습니다(웃음).”
사실 ‘밀수’에서는 선배들의 고생이 후배들의 것을 압도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염정아와 물 공포증으로 공황을 겪었다는 김혜수가 모두 수중 액션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동안 후배는 배의 갑판 위에서 뛰어다니기만 했다. 박정민이 ‘고생’이란 키워드를 두고 몸 둘 바를 모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그런 선배들에게 그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연기뿐이었다고.
“선배님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 압도가 돼요. ‘내가 다 망치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이라 매 순간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게다가 장도리는 가만히 있는 역할이 아니라 분위기를 휘저어야 하는 캐릭터니까요. 항상 ‘나만 잘하면 되는데’ 하며 긴장하고 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제가 잘한 걸 하나 꼽자면 감독님이 시키는 걸 정말 잘해냈다, 그건 것 같아요. 내가 이 영화에서 감독님의 디렉션을 편견 없이 다 받아들이고, 아무 대꾸 없이 잘해냈다. 그게 이 작품에서 저의 장점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밀수’로 ‘박정민의 악역’이란 새로운 페이지를 써낸 그는 박찬욱 감독이 각본을 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전,란’에서 강동원과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장편 사극 영화로는 첫 주연작인 이 작품에서 그는 ‘밀수’의 조인성에 이어 또 다른 미남 배우 강동원과 함께 화면에 잡혀야 한다는 것에 벌써부터 부담이 느껴진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충무로의 거물 감독들이 잇따라 자신을 부른다는 것에 진지한 부담을 느끼기도 할 터였다. 이 질문에 대해 박정민은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역할을 그 중에 한 명이 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미남들과의 작업은 여간 스트레스인 게 아니에요. 제 나름대로 헤쳐 나가야 하는 산 넘어 산이죠(웃음). 무엇보다 동원 선배님은 ‘전,란’ 현장에 나오시는 걸 너무 좋아하시고 그게 눈에 보여서 저도 너무 재미있게 촬영 중이에요. 사실 제가 이렇게 많은 작품에 출연할 수 있고, 감독님들이 저를 선택해 주시는 그런 의중은 제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게 30대, 제 또래 배우들의 충무로에서의 역할이지 않을까 싶어요. 선배님들이 잘 갈아놓으신 텃밭에 30대 배우들이 나타나서 해줘야 하는 역할을 그 중 한 명이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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