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총기난사 전염병’ 이론, 모방범죄 유발 가능성에 촉각…‘예고글’ 살인예비죄 적용 검토 목소리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비슷한 사건 벌어져
총기난사 범죄가 잦은 미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전염병 이론’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져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면 연이어 다른 지역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곤 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총기난사 보도가 평소 반사회적 정서가 강한 누군가의 범죄 본능을 자극해 또 다른 참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연구자인 데이비드 필립스(David Phillips)는 문화 전염(Cultural contagion)과 행동 전염(Behavioral contagion) 이론을 확장해 ‘총기난사 전염병(Mass shooting contagion)’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유발한 지나친 관심을 통해 일어나는 모방범죄 행위를 언급한 이론으로, 가해자들이 총기난사 사건을 통해 명예나 악명을 얻는 것이 근본적인 범행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이 이론은 ‘전염’의 측면에서 유사한 총기난사 사건 발생 확률이 증가하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총기 소지가 불법이라 미국 등과 같이 총기난사 사건은 벌어지기 힘들다. 물론 우범곤 순경 의령 총기난사 사건, 양주 군부대 총기난사 사건,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등 국내에서도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긴 했지만 총기 소지가 가능한 경찰과 군인 등으로 피의자가 한정된 사건이었다.
대신 한국에서 총기가 아닌 칼과 같은 다른 흉기는 소지가 가능하다. 총기난사 사건은 벌어지기 힘들지만 칼부림 사건은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7월 21일 ‘신림 칼부림 사건’이 벌어지고 불과 13일 뒤인 8월 3일 ‘서현역 칼부림 사건’이 발생했다. 과거에도 이런 묻지마 칼부림 사건은 있었지만 이렇게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총기난사 전염병’이 총기 소지가 불법인 한국에선 ‘칼부림 전염병’으로 벌어진 것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서현역 칼부림 사건’은 우연히 시기만 겹쳤을 수도
‘신림 칼부림 사건’의 경우 ‘칼부림 전염병’으로 설명이 가능한 대목이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흉기 난동을 부린 다음 계단에 앉아서 체포될 때까지 편안하게 쉬는 모습이 눈여겨봐야 될 대목”이라며 “언론에서 마이크를 들이대자 사전에 미리 준비한 듯 이야기를 했다. 센세이셔널한 범죄 끝에 일종의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마 뿌리 깊은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식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총기난사 사건을 통해 명예나 악명을 얻는 것을 근본적으로 범행 목적으로 한다는 ‘총기난사 전염병’ 이론이 적용되는 부분이다.
다만 ‘서현역 칼부림’ 사건의 경찰 초기 수사 내용을 보면 다행히 ‘칼부림 전염병’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피의자 최 아무개 씨(23)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특정 집단이 자신을 스토킹하며 괴롭히고 죽이려 한다” “사생활을 전부 보고 있다” 등의 발언을 거듭하며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경찰은 최 씨 범행이 피해망상 등 정신적 질환에 의한 것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경찰은 최 씨가 대인기피증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분열성 성격장애 판정을 받아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아왔던 사실도 확인했다(관련기사 “나를 청부살인하려 해” 횡설수설…서현역 ‘묻지마 칼부림’ 현장).
따라서 ‘신림 칼부림’ 사건과는 무관하게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벌어졌을 뿐인데 우연히 시기가 겹친 것일 수 있다. 이처럼 또 하나의 일회적인 사건일 뿐이라면, ‘총기난사 전염병’ 이론이 설명하는 ‘전염의 측면에서 유사한 칼부림 사건 발생 확률이 증가할 가능성’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 씨가 범행을 사전에 계획한 정황도 포착됐다. 범행에 사용한 흉기 2점을 범행 하루 전인 8월 2일 서현역 인근 대형마트에서 미리 구입한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라인에선 2023년 4월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 ‘진지하게 같이 세상을 경악시킬 공모자를 찾는다’는 제목의 게시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해당 게시글은 그냥 아무나 죽이고 싶다며 같이 테러할 사람을 찾는 내용이었는데 희생자가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해당 글의 원본은 이미 삭제됐고 최 씨와의 연관성도 밝혀지진 않았지만 온라인에선 이 글이 ‘서현역 칼부림’ 사건의 예고라는 의혹이 제기돼 화제가 되고 있다. 만약 최 씨가 평소 이런 묻지마 칼부림 사건을 고민하다가 신림 칼부림 사건이 촉매제가 됐다면 이는 전형적인 ‘칼부림 전염병’으로 볼 수 있다.
#오리, 잠실, 서현, 한티, 의정부…거듭되는 예고글
사실 더 위태로운 상황은 ‘진지하게 같이 세상을 경악시킬 공모자를 찾는다’라는 게시글이 최 씨와 무관한 경우다. 그렇다면 해당 글의 게시자 역시 또 칼부림 사건을 일으킬 수도 있다. ‘신림 칼부림 사건’과 ‘서현역 칼부림 사건’이 ‘전염’의 측면에서 유사한 칼부림 사건 발생 확률을 증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은 연이은 칼부림 예고글을 통해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8월 3일 오후 6시 42분 즈음 ‘오리역 살인 예고글’이 올라왔다. 맘카페 등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확산된 예고글은 “4일 금요일 오후 6시에서 10시 사이에 오리역 부근에서 칼부림하겠다.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경찰도 죽이겠다. 오리역인 이유는 전 여자친구가 그 근처에 살기 때문이다. 너가 아는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인데 흉기 사진을 함께 올려 더욱 충격적이었다.
8월 3일 오후 7시 2분 즈음에는 디시인사이드에 ‘내일(4일) 아침 잠실역에서 20명 죽일 거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고, 오후 7시 9분 즈음에는 역시 흉기 사진과 함께 “금요일 서현역에서 한남들 20명 찌르러 간다”는 예고글이 올라왔다. 밤 11시 즈음에는 “내일 밤 10시에 한티역에서 칼부림 예정입니다”라는 글이, 4일 새벽 1시 57분 즈음에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내일모레 의정부역 기대해라”라는 내용의 ‘의정부역 살인 예고글’도 올라왔다.
신림 칼부림 사건 이후 이런 범행 예고글이 수십 건 올라왔는데 서현역 칼부림 사건 직후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경찰은 해당 예고글들의 최초 작성자에 대해 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예고글이 언급한 지역 일대에 인력을 배치했다. 서울경찰청은 아예 8월 3일 강력범죄수사대에 ‘살인예고글 전담대응팀’을 구성해 사이버범죄수사대가 피의자를 특정하면 전담팀 강력 형사를 투입해 추적 검거하는 방식의 수사에 돌입했다.
이수정 교수는 8월 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당분간은 살인 예고글을 올린 사람들에 대해 살인예비죄를 적용하는 것, 아주 엄격하게 혐의를 적용하는 게 필요한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7월 27일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서도 모방범죄 예고글에 대한 엄벌을 강조한 바 있다. 당시 이 교수는 “만약에 이런 식으로 뭔가 자신의 억제된 부분이 해소될 수 있다는 사실들을 사람들이 공유하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기가 어렵다”며 “그렇기 때문에 사법기관에서도 굉장히 예의주시해야 된다”고 언급했다.
#추가 범행 방지 위해 언론 역할 중요
전문가들은 추가적인 칼부림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막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신림 칼부림 사건’에 이어 ‘서현역 칼부림 사건’이 벌어졌지만 아직 ‘칼부림 전염병’ 이론을 적용할 상황까지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추가 사건이 벌어지면 ‘전염’의 측면에서 유사한 칼부림 사건의 발생 확률이 증가하고, 시민들이 극도의 불안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한 번 칼부림 사고가 벌어질 위기가 발생했다. 서울 서초구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흉기를 들고 돌아다니던 20대 남성이 경찰에 체포된 것. 8월 4일 오전 10시 39분 즈음 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터미널 인근 1층에 흉기를 들고 다니는 남자가 있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10시 45분 20대 남성을 특수 협박 혐의로 체포했다. 남성이 소지하고 있던 흉기 2개도 압수했다. 해당 남성이 식칼을 들고 난동을 부렸고 자해하려는 것 같았다는 목격자들 진술에 따르면 칼부림 사건을 의도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벌어진 일이라 시민들의 충격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4일 오전 10시 3분 즈음 대전 대덕구 소재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40대 교사가 흉기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용의자는 본인을 ‘졸업생’이라고 소개하고 교무실에 찾아와 해당 교사를 찾았고, 수업 중이라는 말을 듣고 교실 밖에서 기다리다 화장실에 가려고 나온 교사를 흉기로 찌르고 도주했다. 경찰은 오후 12시 20분 즈음 대전 중구 태평동 노상에서 용의자를 검거했다. 앞서의 사건들과 달리 ‘묻지마 칼부림’은 아니지만 ‘칼’을 흉기로 사용했다는 점은 유사하다.
전문가들은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모방범죄가 벌어질 위험성이 상당히 큰데 여기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너무 자극적으로 보도하거나 피의자의 얘기를 걸러내지 않고 보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확인 안 된 얘기가 많이 보도되고 피의자의 거짓말까지 그대로 보도된다. 이런 부분이 모방범죄를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칼부림 현장의 폐쇄회로(CC)TV 영상이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부분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런 CCTV 영상은 언론이 아닌 온라인과 SNS 등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극적인 영상이 시민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모방범죄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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