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 천년 세월 이겨낼 신비한 윤기를 더하다
옻칠이란 옻나무를 뜻하는 우리말 ‘옻’과 역시 옻나무 및 옻나무 수액을 가리키는 한자 칠(漆)이 합쳐진 단어다. 옻칠은 옻나무에서 나는 진(수액) 그 자체를 의미하거나, 가구나 그릇 따위에 윤을 내기 위하여 ‘칠’을 바르는 일을 뜻한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칠장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정제해 기물에 칠하는 전통기술 또는 그 기능을 지닌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예부터 옻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에서 주로 자랐으며, 기후 등 지역적 특색에 따라 저마다 옻칠 문화가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옻이 사용된 흔적은 기원전 3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충남 아산 남성리 유적에서 발견된 칠기 파편이 대표적인 예다. 형태가 갖춰진 옻칠 유물로는 창원 다호리, 광주 신창동 유적 등에서 발견된 칠기 그릇과 칼집 등을 들 수 있는데, 기원전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시대에 발전된 칠기 문화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며 더욱 번성했다. 특히 신라에서는 ‘칠전’이란 관청을 두고, 옻칠의 생산과 관리를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칠전은 경덕왕 시절에 식기방(飾器房)으로 이름을 바꾼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궁중에서 칠을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 식기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선 옻칠과 나전(자개 공예)이 결합되어 나전칠기라는 새로운 공예 기법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칠이 이전 시기보다 대중화되어 많은 칠기가 제작됐다. 국가에서도 전국의 옻나무 산지를 파악하여 여기에서 생산되는 옻칠을 공납 받았으며, 서울과 지방에는 칠과 관련된 장인들이 주로 관청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배경도 있었다. ‘태종실록’ 태종 7년(1407) 1월 19일 기사에 따르면 영의정부사 성석린이 ‘시무 20조’(중요하게 다뤄야 할 스무 가지 일)를 담은 상서를 왕에게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금은 그릇의 사용을 금지하고 사기그릇과 칠기의 사용을 장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옻칠이 널리 쓰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주로 사용했던 문방사우 가운데 벼루집·선비상·붓통 등 문방구류에 옻칠을 많이 하였으며, 양반 가정에선 옻칠한 아기장·삼층장·좌경대 등 안방가구가 성행했다.
옻칠의 우수한 기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옻칠을 하면 방수성이 생긴다. 나무로 만든 기물은 물에 썩기 쉬우나 옻칠이 이를 막아준다. 팔만대장경판이 800여 년이 넘도록 원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나무판과 경함에 옻칠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옻칠을 하면 기물에 윤기가 생기고 광택이 나 품격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흑색, 갈색, 황색, 붉은색 등 여러 색도 낼 수 있다. 또한 옻칠은 열과 산성에도 강해 기물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전통 방식으로 옻칠을 하려면 지난한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예부터 칠장은 직접 옻액을 채취하고 용도에 따라 칠을 정제해 사용했다. 칠의 정제 방법은 천연 상태의 생칠을 목제 용기에 담아 2∼3시간 동안 고무래로 혼합하는 ‘고무래질’과 태양열을 이용해 칠의 수분 함수율을 줄임으로써 붓 자국 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교반’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옻칠은 옻액의 불순물 등이 제거되어 입자가 고운 칠로 변하게 되며, 그 후 용도에 따라 동백유, 송진 등 다양한 재료와 염료를 첨가해 숙성 과정을 거치게 된다.
칠공예는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며 그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먼저 소지(칠을 하는 대상인 기물)를 다듬은 후 생칠을 바르고 이를 갈고 다시 바르는 일을 수차례 되풀이하며 공정을 진행한다. 그 후 다시 초칠, 중칠을 하며 건조시키고 다시 상칠을 한 후 광내기, 생칠을 반복적으로 하여 마감한다. 한 번 건조하는 데만 최소 12시간 이상이 걸리고 매 공정마다 기술 이상의 경륜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우리 옻칠 문화는 근대기를 거치면서 전통기술 기반이 점차 쇠락하고 캐슈 등 대체재가 개발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옻칠 채취, 정제 등 원료 가공에 종사하는 이가 드물어 한때는 정제된 칠을 일본에서 수입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정수화 선생이 2001년 국가무형문화재 칠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이후 옻칠 장인들의 노력으로 전통은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 때 옻의 수탈로 인해 맥이 끊어진 옻칠 정제법을 재현하여 윤택하고 신비로운 색채가 돋보이는 우리 옻칠 문화의 정수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자료협조=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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