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눈 가리고 ‘영점’ 잡는 훈련 화제…양현종 하체 밸런스 잡기 훈련 반복
김서현은 이날 등판에 앞서 불펜 투수로만 19경기에 나서 1세이브, 평균자책점 6.64를 기록했다. 구속과 구위는 예상대로 수준급이었는데, 제구가 불안정해 애를 먹었다. 20⅓이닝 동안 삼진 26개를 잡아내는 위력을 뽐냈지만, 동시에 볼넷도 23개나 내주며 흔들렸다. 한화는 그런 김서현을 2군에 보내 투구 밸런스를 조정하도록 했다. 김서현은 2군 등판 경기마다 투구 수를 늘려가며 불펜이 아닌 선발 투수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그러나 첫 선발 등판 결과도 좋지 못했다. 2이닝 3피안타 4볼넷 1탈삼진 3실점으로 조기 강판했다. 특히 2회가 힘겨웠다. 볼넷 3개로 1사 만루 위기를 자초했고, 실점 후 이어진 2사 2·3루에서 다시 볼넷을 추가해 두 번째 만루에 몰리기도 했다. 투구 수 44개 중 스트라이크가 20개로 절반에도 못 미쳤다. 강속구 투수의 영원한 숙제인 '제구력'에 또 다시 발목을 잡혔다.
#제구가 돼야 살아남는다
모든 투수의 꿈은 강속구와 제구력을 겸비하는 거다. 그러나 두 무기를 모두 소유한 행운의 투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바꿔 말하면, 둘 중 하나만 제대로 갖춰도 프로에서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제구가 다소 불안정해도 구속이 빨라 1군에 꾸준히 머문 선수도 있고, 프로 평균에 못 미치는 구속으로도 수준급 제구력을 앞세워 선발 투수로 롱런한 선수도 있다. 다만 두 가지 사례 중 성공 비율은 후자가 훨씬 높다. 강속구는 예나 지금이나 투수들에게 가장 유혹적인 무기지만, 빠른 공만으로는 프로 타자들과 제대로 승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김서현뿐만 아니라 수많은 강속구 투수들이 데뷔 직후 제구력을 가다듬느라 고전해야 했던 이유다.
수년 전 한 메이저리그 구단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는 "한국 투수들이 공을 던지고 난 뒤 곧바로 전광판에 찍힌 구속부터 확인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고 아쉬워한 적이 있다. 학창시절부터 "공은 무조건 빠른 게 최고"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투수가 다른 리그보다 유독 많았다는 의미다.
물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도 투수의 '구속'을 눈여겨 보는 건 사실이다. 올해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입단한 심준석이나 내년 LA 다저스 입단을 확정한 장현석(마산용마고)은 모두 시속 150㎞대 중후반의 강속구를 뿌려 일찌감치 빅리그 구단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그러나 일단 프로에 입단하는 순간 '구속'은 부차적인 요소가 된다. 제구가 뒷받침되지 않은 강속구는 더는 무기가 아니다. 숫자로 즉각 표현되는 구속보다 수치화하기 어려운 '커맨드'가 투수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열쇠다.
#제구력도 구속처럼 타고난다?
일반적으로 "컨트롤이 좋다"고 알려진 투수는 공 10개 가운데 7~8개를 원하는 코스로 집어넣는다. 야구 전문가들은 "구속만큼은 아니라도 제구력 역시 타고난 능력이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다"고 얘기한다. 투수 출신인 전직 감독은 "투수들 특유의 손끝 감각은 연예인들의 '끼'와 비슷하다"며 "손끝 감각이 좋은 선수들은 새 구종을 쉽게 익히고, 변화구 컨트롤이 다른 선수들과 확연히 좋다"고 증언했다. 좋은 체격과 유연성을 타고난 선수들이 구속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데 유리하듯, 제구 역시 좀 더 수월하게 다듬을 수 있는 무형의 재능을 보유한 선수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
한 투수코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능력은 훈련으로 연마할 수 있지만,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과감하게 이용하는 커맨드와 강심장은 타고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인왕을 받았던 한 투수 출신 야구인 역시 "제구력은 마인드에서 좌우된다. 실전에서 자신의 볼을 던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담력에서 판가름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스피드보다 제구력이 더 선천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강속구에 신체적인 재능이 필요하다면, 제구력에는 정신적인 재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도 제구력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면도날 제구력으로 유명한 투수들도 모두 최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무수히 많은 훈련을 거쳤다. 현역 시절 최고의 제구력을 자랑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야구인은 "손 감각을 타고 났든 아니든, 일단 공을 많이 던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던지다 보면 어떻게든 감각이 잡힌다"며 "아무리 훈련해도 컨트롤이 안 좋아지는 투수는 근본적인 폼의 문제이거나 정신적인 문제일 수 있다. 많이 던지면서 스스로 원인을 찾아내면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KIA 타이거즈 양현종도 공을 던질 때 늘 앞으로 쏠리던 하체를 뒤로 당기는 훈련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제구력을 잡은 케이스다. 프로 입단 초기에는 제구력 문제로 애를 먹었지만, 하체 밸런스가 좋아지면서 컨트롤도 향상돼 프로 정상급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투수 출신인 또 다른 감독은 "컨트롤은 첫째도, 둘째도 밸런스가 중요하다. 후천적인 훈련에 크게 좌우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제구가 좋아지는 방법
최근 JTBC 예능프로그램 '최강야구'를 통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은 과거 구위가 좋지만 제구가 들쑥날쑥한 투수들에게 눈을 가리고 던지는 훈련을 시켜 화제를 모았다. 앞이 안 보이면 사람의 몸 전체에 힘이 빠지게 되는데, 그 상태로 '영점'을 잡으면 제구 감각을 익히는 데 효과적이라는 뜻에서다. 또 왼손 투수는 오른쪽 눈, 오른손 투수는 왼쪽 눈에 각각 안대를 쓰게 하고 피칭을 시키기도 했다. 축이 되는 다리의 밸런스를 교정하기 위해 고무줄로 한쪽 다리를 잡아당긴 상태에서 공을 던지게 하는 방법도 많이 썼다.
이런 독특한 훈련법이 아니더라도, A급 투수들은 저마다 제구력을 잡는 데 도움을 됐던 자신만의 비법을 하나씩 갖고 있다. 한 야구기자는 2007년 뉴욕 메츠 스프링캠프를 취재하다가 레전드 투수 톰 글래빈의 불펜 피칭을 목격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글래빈이 불펜 양쪽에 줄 두 개를 가로로 팽팽하게 묶어놓은 뒤 끊임없이 줄의 높낮이를 조절해가면서 공을 던지는 훈련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가 던지는 공의 대부분이 빨랫줄을 직접 맞히거나 절묘하게 스쳐 지나갔다는 후문이다. 집요하리만치 정확한 컨트롤로 1990년대를 장악했던 전설적 투수의 근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 전 KIA 감독도 고려대 2학년이던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기간에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당시 국가대표 포수였던 고 심재원은 선동열보다 무려 열 살이 많은 대선배였다. 합숙훈련 도중 불펜에서 후배 선동열의 공을 받던 심재원은 갑자기 "지금부터 무조건 내 미트 안으로 공을 던져라"라고 주문했다. 대학생 후배의 구위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한 선배가 제구력을 잡기 위한 깜짝 훈련을 제안한 것이다.
심재원은 자신이 원하는 코스에 미트를 댄 뒤 선동열의 공이 미트 바로 옆을 스쳐도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공이 뒤로 빠져나가 백스톱까지 튕겨져 나가면, 마운드에 있던 선동열이 포수 뒤까지 달려가 공을 다시 가져와야 했다. 미트 안으로 정확하게 공을 꽂아야만 선배 포수가 던져주는 공을 돌려 받을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한여름에 땀을 비 오듯 쏟던 선동열은 훗날 "막상 훈련할 때는 너무 힘들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그때 제구에 대한 집중력이나 정교함이 무척 좋아진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뿐만 아니다. 느린 공으로도 정상급 컨트롤을 자랑했던 한 투수는 네트에 사각형 모양의 박스를 그려놓고 네 개의 모서리로 공을 던지는 훈련을 반복했다. 제구가 좋기로 유명한 일본 프로야구 투수들의 영상도 유심히 분석해 롤 모델로 삼았다. 또 다른 투수는 고교 시절과 프로 입단 초기에 자진해서 타자들의 훈련용 배팅볼을 던지면서 제구력 훈련을 하기도 했다.
#제구는 '롱런'의 무기
컨트롤이 좋은 투수들에게는 확실한 강점이 있다. 확률적으로 강속구 투수들보다 더 오래 프로에서 살아남는다. 구속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때 제구력이라는 밑바탕이 잡혀 있어야 달라진 자신의 몸에 적응할 수 있다. KBO리그에서 유일한 200승 투수인 송진우 전 한화 투수코치가 20대 시절 강속구 투수에서 30대 이후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 마흔 이후까지 선수 생활을 한 모범 사례다.
한국 야구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인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KBO리그에서 강속구 투수로 분류됐지만, 평범한 투수도 시속 150㎞를 손쉽게 넘기는 메이저리그에선 '컨트롤 피처'로 불렸다. 그는 빅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구속을 늘리는 것이 아닌,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제구를 더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한국에서도 강점이었던 허를 찌르는 볼배합과 기민한 경기 운영으로 존재감을 더 빛냈다. 그가 강속구 없이도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정상급 투수로 각광 받은 비결이다. 류현진이 아시아선수 최초로 메이저리그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던 2019년, LA 타임스는 "놀라운 제구력이 류현진을 최상급 투수의 자리에 올려 놓은 비결"라고 썼다. 스포츠 전문매체 SB네이션은 "류현진이 경기 중 볼넷을 내준다면, 그것 자체가 뉴스거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현역 시절 100승 이상을 거두고 은퇴한 한 야구인은 이와 관련해 "제구력이 있고 몸 관리를 잘하는 선수들이 프로에서 롱런하기 마련"이라며 "공만 빠른 투수들은 대부분 손으로 스킬을 습득하는 능력이 더뎌 오래 가기 어렵다"고 했다. "투수는 누구나 강속구를 원하지만, 자신이 가진 스피드를 지나치게 믿다가 다른 기술에 대한 절실함이 떨어지는 선수들이 많다"는 설명이다. 이 야구인은 "결국 투수는 공이 빠르든, 느리든 제구가 기본이다. 만약 내가 감독이 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공이 느려도 제구력 있는 투수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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