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경력 침묵도 기망” 4월 이어 8월에도 원고 승소…“혼인신고 시점 악질 전과 몰랐다” 입증 관건
#아내 지인까지 성폭력…남편의 실체
여성 A 씨와 남편은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20대 미남미녀 커플이었다. 각자 타지에서 올라와 이웃주민이 된 두 사람은 만난 지 약 3개월 만에 연애에 동거까지 시작할 만큼 마음이 잘 맞았다. 도중에 양쪽 부모한테 동거 사실이 들켜 잠깐 떨어지긴 했어도 기어코 다시 결합해 결혼까지 약속했다.
약혼을 한 뒤 A 씨는 남편의 새로운 면모들을 보기 시작했다. 술이 문제였다. 마시기만 하면 폭언에 여성 편력이 도졌다. 결혼식을 불과 약 한 달 앞둔 시점에 '첫 번째 사건'이 터졌다. A 씨의 친구 커플과 만나 네 사람이 술자리를 함께했다. A 씨는 다음날 출근 때문에 늦게라도 자야 했지만, 직장이 없던 남편은 술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에 A 씨가 자리를 끝내자고 제안하자 남편은 "남자를 무시한다"는 폭언을 하고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모두를 내쫓았다.
A 씨는 이런 남자와 살아도 될지 우려가 컸지만 결혼을 강행했다. 가끔 나온 고약한 술버릇만 제외하면 대화도 잘 통하고 늘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각한 주사는 결혼식 당일에도 이어졌다. 신혼여행에서 음주운전을 하고, 이를 만류하면 무자비한 폭언을 해 A 씨는 혼자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약 1년 만에 '두 번째 사건'이 터졌다. A 씨 부부는 다른 커플 및 혼자 온 여성들과 단합 형식의 모임을 가졌다. A 씨는 먼저 잠에 들었고 남편과 일부 무리는 더 남아 술을 마셨다. 그러다 A 씨가 잠에서 깼다. 밖에 경찰이 와 있었다. 남편이 무리의 한 여성에 성폭력을 시도했다는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것이었다.
피해 여성은 A 씨와 가깝지는 않지만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 후 주변에서 들어보니 A 씨 지인 가운데 남편한테 성폭력를 당했다는 여성들이 더 있었다. 결국 남편의 범죄이력을 살피게 됐는데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남편은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질러 법원에서 실형 선고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침묵도 사기'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판사 하성우)은 8월 10일 A 씨와 남편 두 사람의 혼인을 취소하고, 남편이 위자료 3500만 원과 재산의 절반가량을 분할해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수차례에 걸쳐 아내의 지인에게까지 유사강간을 저지르는 등 죄질이 몹시 안 좋으므로, 혼인 파탄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편에게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번 판결은 좀처럼 잘 나오지 않는 혼인 취소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한 판결이라는 시각이 나온다. A 씨는 '남편의 성범죄 사실을 몰랐다'는 점에서 기망, 즉 사기에 의한 결혼을 주장하며 혼인 취소를 요구했는데 과거에는 '적극적' 기망행위가 벌어졌을 때에만 혼인을 취소했다.
예컨대 10년 전인 2013년 판례를 보면 남편이 결혼 전 학벌과 소득수준을 과장했다고 아내가 낸 혼인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사기를 이유로 혼인을 취소하려면 '적극적인 허위사실 고지' 등 위법한 수단이 수반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A 씨 사건의 재판부는 '소극적인 기망행위'를 들어 혼인을 취소했다. 남편이 성폭력 전과가 있음에도 없다고 속이는 등의 적극적 기망행위는 없었지만, 결혼에서 성폭력 전과 등 중대한 사실에 관해서는 '침묵도 사기와 마찬가지'라는 취지에서다. 오히려 남편이 먼저 관련 사실들을 결혼 전 자세히 알릴 필요가 있다고도 부연했다.
보기 드문 판결이지만 올해에만 연달아 나왔다. 이에 앞서 올 4월 10일 전주지방법원(판사 최치봉)은 한 탈북여성이 남편을 상대로 낸 혼인 취소소송에서 두 사람의 혼인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 남편이 800만 원의 위자료도 지급해야 한다고 명했다.
이 탈북여성은 2016년 한국에 입국한 후 인터넷 중매사이트에서 남편을 만나 지난해 3월 결혼했다. 신혼 초기부터 남편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씻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늘 발찌를 차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을 성폭력이 아닌 다른 범죄 전력이 있어서 발찌를 차게 됐다고 속였다.
탈북여성은 자신에게 안부를 묻는 국가기관 요원에게 발찌 관련 설명을 하다 진실을 알게 됐다. 여성가족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나오는 성범죄자 알림e 서비스 조회를 통해 남편이 10년 전 특수강제추행, 특수강도강간 등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 받은 사실까지 확인했다.
이 사건의 재판부는 "범죄경력은 혼인을 결정하는 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유로, 아내가 관련 사정을 알았더라면 혼인을 결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남편은 혼인신고 당시 원고에게 자신이 부녀자들을 강제추행하거나 강간한 범죄사실로 징역 8년을 선고 받았던 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혼인 취소소송에서 이겨도 과거의 결혼 자체가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장래에 향해서만 소멸되기에 만약 혼인 중 출생된 자녀가 있다면 취소 처분이 나오더라도 적출자로서의 신분을 잃지 않는다. 혼인관계증명서 기록도 남는다. 무효혼인에서 출생된 자녀가 혼외 출생자로 인정되고, 기록도 없어지는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단 혼인 취소가 인정되면 결혼 실패 원인이 일방적 피해 탓이라는 점을 보여주므로, 피해자 입장에선 재혼이나 일상의 삶을 이어가는 데에 있어 이혼보다 비교적 나은 판결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혼인신고 시점'에 주목해야 취소 판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법무법인 YK의 배연관 변호사는 "혼인 무효는 부모 때문에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되는 등 애초부터 혼인 의사가 없었을 경우에 제한적으로 인정돼 승소가 쉽지 않다"며 "혼인 취소의 경우 소를 제기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 역시 인정 조건이 대단히 까다로워서 관련 판례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배 변호사는 이어 "혼인신고 시점에 결혼 생활을 이어가기 힘든 악질적인 사유를 몰랐다는 점을 입증해야 취소 사유로 인정될 여지가 생긴다"면서 "그렇다 보니 사실혼 등의 관계라면 승소가 쉽지 않아 위자료 분쟁에서 불리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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