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오페라발레단부터 마린스키발레단까지
그 창대한 출발은 30년 만의 내한이라는 엄청난 수식어를 동반한 파리오페라발레단이었다. 공연장을 역삼에서 마곡으로 이전한 LG아트센터는 올해 3월 새로운 시즌의 첫 번째 공연으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지젤’을 무대에 올렸다.
도로테 질베르, 미리암 울드 브람, 레오노어 볼락, 제르망 루베 등 발레단의 스타 에투알(수석무용수)들이 함께 내한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는 무대 앞에서 관객들은 누구의 공연을 봐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진귀한 장면도 목격됐다. 에투알 위고 마르샹이 부상으로 내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자 대타를 투입했는데, 발레단 354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흑인 무용수 기욤 디옵을 에투알로 지명한 것이다(승급 오디션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이지만 에투알만큼은 예술감독의 추천을 받아 파리 국립오페라극장장이 지명한다. 새로운 에투알은 대상이 되는 무용수의 공연이 끝난 직후 무대에서 발표된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공연이 끝나자 이번에는 국내 발레계 양대 산맥인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차례로 ‘지젤’을 선보였다. 유니버설발레단은 4월에 투어 공연으로 부산과 서울 강동에서 관객들을 만났고, 국립발레단은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참가작으로 5월에 서울 관객들을 만나는 한편 투어 공연으로 용인, 여수, 익산 무대를 찾았다.
7월에는 발레STP협동조합이 ‘지젤’ 바통을 이어받았다. 발레STP협동조합은 2012년 결성된 민간발레단 연합체로 현재는 유니버설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이원국발레단, SEO발레단, 와이즈발레단, 김옥련발레단,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7개 단체가 꾸준히 합동공연과 축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발레STP협동조합의 공연에서는 발레단 연합체라는 성격 덕분에 유니버설발레단과 와이즈발레단의 주역이 나란히 무대에 오르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오는 11월에는 마린스키발레단이 내한해 올해 ‘지젤’ 대장정의 장엄한 마침표를 찍을 예정이다. 마린스키발레단은 2020년 한⸳러 수교 30년을 맞아 ‘지젤’로 내한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내한 일정이 취소된 바 있다. 아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불안 요소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내한이 무사히 성사된다면 마린스키의 공연을 2018년 이후 5년 만에 볼 수 있다.
# 사랑과 배신 그리고 구원과 승리의 이야기
‘백조의 호수’가 발레리나에게 오데트와 오딜의 1인 2역에 도전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한다면, ‘지젤’은 1막의 사랑밖에 모르는 순수한 소녀와 2막의 자신을 죽게 한 연인의 구원자가 되는 고결한 영혼을 표현해야 하는, 1인 2역 이상의 어려운 연기력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미국 무용평론가이자 극작가인 월터 소렐은 “모든 발레리나들은 지젤을 춤추고 지젤로 죽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발레에서 ‘지젤’이 차지하고 있는 높은 위상과 발레리나가 그 역할을 얼마나 선망하는지 알려주는 말이다.
‘지젤’이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의해 초연된 것은 1841년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사이 산업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부상이 본격화되던 시기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830년 샤를 10세가 시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지고 루이 필립 1세가 입헌군주로 추대되고 나서 국가, 즉 왕이 소유하고 있던 오페라극장은 국가의 후원을 받으며 민간에서 경영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주로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던 관객층에 금전적 여유가 생긴 부르주아 계층이 대거 유입되었다. ‘지젤’ 1막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이러한 사회 변화와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한다.
‘지젤’의 배경은 독일의 시골마을이지만 극의 내러티브에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첨예한 계급 갈등이 스며들어 있다. 1막에서 신분을 속이고 접근한 귀족의 비밀이 밝혀지자 그와 결혼할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시골처녀는 충격으로 죽음에 이른다. 지젤의 죽음은 단순히 좌절된 결혼이라는 개인적 비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벽으로 존재하는 계급구조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비극으로 발전한다.
1막의 주된 기조가 계급 간의 갈등이라면 2막은 젠더 간의 갈등이 중심에 놓인다. 결혼 전날 예비 남편에게 버림받고 목숨을 잃은 여성들은 ‘윌리’라는 처녀귀신이 되어 숲을 배회하는데, 여기에서 밤의 숲이라는 공간은 윌리들이 숲에 발을 들인 남성들의 목숨을 취하는 복수의 무대가 된다.
낭만주의 발레에 이르러 비로소 극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게 된 여성 무용수들은 남성 무용수의 보조 역할이 아닌 자신만의 동기와 움직임과 해석으로 배역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비단 가련함과 아름다움과 젊음을 가진 주인공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같은 동기를 가진 여성 공동체인 윌리는 자신들의 손으로 남성들을 처단하는 초자연적 존재다. 그들에게 목숨을 잃는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심판을 당한다.
# 사회가 정한 규범에 정면으로 도전
지젤은 작품 내에서 사회가 정한 규범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1막에서 지젤은 계급사회가 그녀에게 허락하는 결혼, 즉 힐라리온의 구애를 마다하고 귀족 알브레히트와의 결혼을 꿈꾸다 죽음을 맞이하며, 2막에서는 숲에 들어온 남성을 춤추게 해 목숨을 취해야 하는 윌리들의 규율에 맞서 알브레히트와 함께 춤추고 그의 목숨을 구한다.
1막에서 지젤의 도전은 패배로 끝나고 그 결과 목숨을 잃게 되지만 2막에서 그녀는 승리한다. 지젤의 승리로 알브레히트는 목숨을 잃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지젤을 패배시키거나 승리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사랑이다.
지젤은 농민 계급이지만 그녀의 운명은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 결정은 알브레히트를 사랑한 것과 그의 목숨을 구한 것 모두 해당된다(고티에의 원래 대본에서는 지젤이 알브레히트의 검으로 자결하고 2막에서 무덤으로 돌아가기 전 알브레히트를 향해 바틸드와 결혼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지젤의 자기 결정을 드러내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지젤’보다 10여 년 전에 발표되어 낭만주의 발레의 기틀을 마련한 ‘라 실피드’에서 주인공들의 운명이 마녀의 점괘에 의해 정해지는 것과 달리, 주인공의 이름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지젤’에서 주인공 운명은 스스로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한 동기는 사랑이고, 지젤의 승리는 사랑의 구원자로서의 승리다. 사랑에 대한 배신으로 죽음에 이른 여성이 사랑의 구원자가 되어 승리하는, 결국 사랑이 불멸을 획득하는 이야기다. 지젤의 사랑은 죽음을 통해 완전한 것이 되었으며, 그는 죽은 뒤 완전하게 이상적인 여성이 되어 사랑 속에 영원히 살아남는다.
윤단우는 주로 사람과 사랑과 삶에 관한 생각의 편린들에 대한 글을 쓰며, 댄서가 반짝이는 무대와 숨찬 마감이 기다리는 데스크를 오갑니다. 쓴 책으로 여성주의 공연비평집 ‘기울어진 무대 위 여성들’과 무용현장 에세이 ‘여성, 신체, 공간, 폭력’ 등이 있으며, 여성주의 공연 뉴스레터 ‘위클리 허시어터’를 매주 발행하고 있습니다.
윤단우 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