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회화 중 현대적 표현성이 보이는 것이 민화다. 민화는 조선 말기에 나온 그림이다. 감정 표현을 천시하던 성리학의 나라에서 표현주의 성향의 회화가 나왔다는 게 신기하다.
민화에는 글자를 소재 삼은 그림이 있다. 문자도다. 유교적 교훈이나 기복적 신앙의 한자를 장식적으로 구성한 그림이다. 글자의 의미와 관계 있는 옛 이야기를 한자의 획 속에 넣어 아름답게 꾸민 그림이다. 그래서 꽃 글씨라고도 불린다.
문자를 회화 표현의 한 방법으로 수용한 예는 서양 회화에서도 보인다. 195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추상미술 가운데 ‘타시즘’이라는 것이 있다. 작가의 자유로운 붓놀림을 중히 여기는 경향이다.
추상표현주의의 한 갈래인 타시즘은 필력과 거친 붓 터치, 붓에서 뚝뚝 떨어져 생긴 점 등으로 그림을 만드는 방법이다. 화선지에 붓으로 글씨 쓰듯 밑그림 없이 한순간에 무엇인가를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숙련된 손놀림과 순식간에 빈 화면을 구성할 수 있는 직관력 없이는 불가능한 그림이다. 서예의 기본인 직관적인 제작 태도를 서양에서 따라한 셈이다.
타시즘의 생명은 서예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필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타시즘을 ‘서법적 추상’이라고 부른다. 중국계 프랑스 작가 자오우키는 한자의 획을 활용한 회화로 서법적 추상의 대표작가가 되었다. 이우환 역시 한자의 기본 획과 점을 응용한 추상 회화로 성공한 경우다.
오민준도 문자를 주제로 새로운 글씨 회화에 도전하는 작가다. 특히 그는 한글을 이용해 독보적 회화 언어를 개척하는 실험적 시도를 하고 있다.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는 글자가 아닌,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글자인 한글의 매력에 빠져 작업을 시작했다”는 오민준은 “표현 방법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재료와 도구를 개발하고, 독창적인 자형을 만들기 위해 공간과 사투를 벌이듯 작업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한글은 한자와 달리 뜻을 품은 문자가 아니다. 소리 나는 대로 표현하는 글자이기에 뜻을 담지는 못한다. 그러나 모음과 자음을 합성해서 구성하는 독특한 구조와 가로세로, 전후좌우를 아우르는 짜임이 가능하기에 조형성의 폭이 매우 넓다. 여기에 문자 모양을 자유자재로 변환할 수 있는 매력까지 더해진다.
이렇듯 한글이 가진 변화의 스펙트럼은 현대 디자인 감각과도 궁합이 잘 맞는다. 이런 이유로 현대 회화의 새로운 표현 영토로 손색이 없다.
오민준의 작업은 이러한 한글의 표현력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랜 세월 서예로 다져온 필력과 추상 회화의 감각을 결합한 신선한 그의 작업은 현대 회화의 새로운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